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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보다 많았던 실패… 히말라야가 품은 산악인 엄홍길의 '생존기'

입력
2024.07.06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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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달성
22년간 동료 10명 잃으며 좌절했지만
먼저 떠난 동료들 위해 산 타며 버텨
신에게 "제발 살려달라" 애원하기도
"살려주면 혼자 누리지 않겠다" 약속 지켜
인생 17좌 목표는 산사람들 지원하는 것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생존자'

엄홍길을 표현하는 다양한 수식어 중 하나로, 어쩌면 그를 가장 잘 표현한 수식어이기도 하다. 그는 지구상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해 히말라야 고봉 16좌를 세계 최초로 등정하며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실패와 상실을 겪어내야 했다. 히말라야 등반 38번 중 22번은 정상에 닿기 전에 발을 돌려야 했고, 사랑하는 동료를 눈앞에서 잃고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자신 또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홍길이 꾸준히 산을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위기가 들이닥칠 때마다 히말라야의 신에게 "살려달라" 빌었고, "살려만 주면 그 은혜를 혼자 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신은 적잖은 시련과 고통을 줬지만 끝내 그를 품었고, 엄홍길도 약속을 지켰다. 오르기 위한 산이 아닌, 산 그 자체와 산에 사는 사람을 위한 길고 긴 등반을 시작한 이유다.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 엄홍길휴먼재단에서 엄홍길을 만나 22년간의 생존기와 그 후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1988년 2전3기 만에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1988년 2전3기 만에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무모했던 첫 시도와 참담했던 첫 실패

엄홍길의 첫 에베레스트 원정은 무모함 그 자체였다. "생전 히말라야 근처도 안 가본 놈이 처음부터 겁도 없이 덤빈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엄홍길은 1985년 첫 히말라야 등반 전까지 3,000m 이상 고산을 올라본 적이 없다. 에베레스트도 고등학교 1학년 때 고(故) 고상돈 산악가의 등반 성공 사진에서 본 게 전부다.

그가 가진 건 세 살 때부터 도봉산 산자락에 살며 키워온 체력과 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감뿐이었다. 스물네 살 무렵 어느 산악회 선배의 추천으로 히말라야 원정팀에 선발됐을 때 걱정보다 설렘이 더 컸던 것도 이 자신감 덕분이다. 엄홍길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두려움도, 거침도 없었다"며 "내가 마음먹으면 못 올라갈 곳이 없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7년 가셔브룸 등반 때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1997년 가셔브룸 등반 때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 건 해발 7,000m를 넘어서고부터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한 바람과 맹추위가 들이닥쳤다. 국내에서만 산을 탄 엄홍길의 시야나 체력, 기술, 정신력은 모두 1,000m에 맞춰져 있었기에 고지대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규모에 압도돼 거리 가늠도 쉽지 않았다. '저기' 있는 줄 알았던 것들도 막상 가보면 '저어어어어기'에 있었다. "너무 놀랍고 암담했다"던 그는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졌고, 거대한 산 앞에서 난 한낱 먼지조차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첫 시도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엄홍길은 "에베레스트 신께서 '정신 차려라 이놈! 네가 어디 감히 준비도 없이 내 머리 위로 오를 수 있겠느냐'고 호통치는 것 같았다"며 "너무 부끄럽고 참담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혹독했던 첫 상실의 기억... "내 인생에 히말라야는 없다" 다짐하기도

첫 실패를 통해 산에 대한 겸허함을 배운 엄홍길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신은 쉽사리 정상을 내주지 않았다. 두 번째 도전에서는 8,000m를 넘어서던 때 사고가 발생했다. 뒤따라 오던 셰르파가 3,000m 높이 암벽에서 추락한 것. 셰르파를 찾기 위해 정상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엄홍길을 맞이한 건 부상당한 셰르파도, 그의 시신도 아닌 참혹한 흔적뿐이었다.

"이리저리 튄 피와 찢긴 옷가지, 벗겨진 신발 한 짝 등이 널브러져 있는데, 그 흔적들이 너무 처참했다"며 깊은숨을 내쉰 엄홍길은 "산에서 동료를 잃은 건 처음이라 충격이 너무 컸고, '운명이 뒤바뀌었어야 했다'는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하산길에 "더 이상 내 인생에 히말라야는 없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엄홍길을 다시 산으로 이끈 건 놀랍게도 먼저 떠나보낸 셰르파였다. 어느 날 문득 "그가 가지 못한 곳에 내가 올라가서 그의 한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에베레스트 등정이 더 이상 엄홍길 개인의 목표가 아니게 된 것이다. 마침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히말라야 원정팀이 꾸려졌고, 죽은 동료의 사진을 품에 안고 등정한 엄홍길은 정상에서 나즈막하게 그에게 "고맙다"고 읊조렸다.

고(故) 박무택(오른쪽) 대원과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고(故) 박무택(오른쪽) 대원과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무택과 함께 죽음을 기다렸던 히말라야의 밤

이후로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산은 매번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순식간에 동료들을 앗아갔다. 히말라야 등반 22년간 잃은 동료만 10명에 달한다.

모든 이들의 죽음이 한결같이 마음에 사무치지만, 고(故) 박무택 대원의 죽음은 유독 힘이 들었다. 엄홍길과 히말라야 4개봉을 함께 올랐던 박 대원은 2000년 칸첸중가(8,586m) 3번째 등반 때도 '죽음의 밤'을 함께 지샜다. 당시 해발 7,300m 부근에서 셰르파 1명이 낙빙에 맞아 숨진 뒤 겁을 먹은 대원들이 하나둘 등정을 포기했고, 정상을 약 400~500m 앞둔 상황에서 엄홍길과 박 대원 둘만 남았다.

의지 하나만으로 버텼지만, 정상 100m 앞에서 위기가 닥쳤다. 엄홍길은 "빙벽에 매달려 있었는데, 힘이 다 빠져 더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없었다"며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을 정도"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엄홍길이 2000년 고(故) 박무택 대원과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오른 칸첸중가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은 박 대원이 찍어줬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엄홍길이 2000년 고(故) 박무택 대원과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오른 칸첸중가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은 박 대원이 찍어줬다.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빙벽에 겨우 엉덩이만 살짝 걸칠 정도의 얕은 홈을 파고 죽음을 기다렸다. 무전에 답할 힘도 없어 무전기도 껐다. 자신보다 2m 정도 위에 주저앉은 박 대원을 향해 간간이 "무택아... 졸면 안 된다... 졸면 죽는다"고 말했지만,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죽었구나" 생각했지만 낙담할 겨를도, 눈물 한 방울 흘릴 힘도 없었다. 8,000m 고지대에서 텐트 없이 밤을 지새면 살아있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라 체념한 것이다.

고(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고(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살아남았지만 엇갈린 운명... "내가 데리러 갈게"

10시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강렬한 빛이 고글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아침 햇빛이 닿는 순간 서서히 온기가 차올랐다. 얼른 박 대원을 불렀다. "야야야, 살았다" 하면서 고개를 겨우 돌렸는데 머리를 떨군 박 대원은 미동이 없었다. "무택아, 무택아, 우리 살았다고. 야, 인마 살았다"고 외치기를 여러 번. 꿈쩍 않던 박 대원이 "어어어" 하더니 "어휴 대장님, 살았네요 살았어"라며 고개를 들었다.

죽다 살아온 두 사람의 운명은 이후 완전히 갈렸다. 박 대원은 4년 뒤 학교 후배들과 함께한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하산길에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엄홍길에게 적잖은 타격을 줬다. 특히 박 대원의 시신이 등반로 근처 벽에 매달려 있는 사진을 봤을 땐 심장이 내려앉았다.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곳에 후배를 매달아 둘 순 없었다. 고심 끝에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려 박 대원 시신 수습에 나섰다. 정상 정복이 아닌 시신 수습을 위한 원정은 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제 한 몸 가누기도 어려운 고지대에서 100㎏에 달하는 박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필 하산하던 중 기상도 급격히 악화됐다. 계속 옮기다간 필시 대형사고가 날 것 같았다. 엄홍길은 "에베레스트 신이 딱 여기까지만 허용해주는구나 싶었다"며 "무택도 '어찌 나 혼자 내려갑니까. 여기에 (함께 등정했던)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는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결국 엄홍길은 박 대원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작별인사를 고한 뒤 쓸쓸히 에베레스트를 내려왔다.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엄홍길 휴먼재단 상임이사가 6월 19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산사람을 위한 엄홍길의 마지막 목표

2007년 봄 로체샤르를 끝으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을 마친 엄홍길은 이듬해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하며 '인생 17좌' 등반에 나섰다. 그는 "17번째 고산은 오랜 기간 공들여 넘어야 한다"며 "나를 품어준 히말라야에서 인재를 잘 키울 수 있게, 그들이 더 잘 자랄 수 있게 꾸준히 지원하는 게 이번 등반의 목표"라고 말했다.

엄홍길은 재단을 통해 히말라야 신과 했던 약속, 그리고 떠나보낸 동료에게 다짐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지켜나가고 있다. 처음 떠나보낸 셰르파의 마을에 지은 첫 학교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17개교가 히말라야 오지에 들어섰다. 현재 추가로 2개교가 지어지고 있으며, 가족 같은 셰르파들을 위해 해발 3,700여m에 병원도 세웠다.

엄홍길은 "학교며 병원이며 지어주고 끝이 아니라 꾸준한 유지보수와 관리가 필요하다"며 "17좌는 내 목표이자 희망이기 때문에 여력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지원할 것"이라는 각오를 전했다.


김진주 기자
자료조사 성민호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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