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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들

입력
2024.07.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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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이소룡-들'. 에이디지컴퍼니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이소룡-들'. 에이디지컴퍼니 제공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는 쿵후 스타 리샤오룽(이소룡· 1940~1973)을 추종한 한 사내의 이야기다. 집안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란 주인공이 홍콩으로 건너가 제2의 브루스 리가 되길 꿈꾸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지금이야 이소룡 추종자를 찾기 힘드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쌍절곤을 돌리며 이소룡 흉내 내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 당시 제2 이소룡이 되겠다는 꿈은 현실이었다. 이소룡의 영화들이 전 세계적으로 히트한 건 그가 죽은 뒤였다. 이소룡이 홍콩에서 촬영한 쿵후 영화는 고작 4편에 불과했다. 심지어 유작 ‘사망유희’(1972)는 미완성작이다. 이소룡의 요절로 홍콩 영화계는 막 캐기 시작한 금맥이 막힌 셈이었다. 홍콩 영화계는 홍콩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소룡 닮은꼴 찾기에 나섰다. ‘인재 등용’을 위해 신문 광고까지 내 아시아 젊은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이소룡-들’은 당시 홍콩으로 가 제2 이소룡이 된 사람들의 사연들을 풀어낸다. 미얀마 쿵후 도장 사범 출신인 여소룡(브루스 레)과 대만 체조 선수 출신 허쭝다오(브루스 라이), 홍콩 배우 양소룡(브루스 량) 등이 이소룡 대체 배우로 활약했다. 한국 배우 문경석은 거룡(드래곤 리)으로 스크린을 누볐다. 특정 배우가 죽은 후 그를 닮은 배우가 출연해 아류작들을 쏟아낸 건 세계 영화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 조금은 씁쓸한 이유로 ‘가짜 이소룡’이 통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아시아인 얼굴 구분을 잘 못했다. 얼굴이 닮았거나 무술 실력이 특출 나면 누구나 이소룡이 될 수 있었다. 인공지능(AI)은커녕 컴퓨터그래픽(CG)도 없던 시절 벌어진 일들이다. 이소룡이 세상을 떠난 지 51년이 지났다. 이제 배우들은 죽지 않고도 자신의 옛 영상들이 자신을 대체할지 모를 공포를 맞이하고 있다. 홍콩 영화계의 지독한 상혼이 제2 이소룡들을 만들었으나 그들의 이야기는 그래도 ‘인간’적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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