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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한국전쟁을 잊지 못하게 한 것...19개의 이 조각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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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술 작품 한 점에는 질문이 끝없이 따라붙습니다. '양정무의 미술 읽어드립니다'는 미술과 역사를 넘나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여러분의 '미술 지식 큐레이터'가 되어 그 질문에 답하는 연재입니다. 자, 함께 그림 한번 읽어볼까요.
미술이 전쟁을 기록하는 결정적 다섯 순간을 지난달부터 3회에 걸쳐 다루고 있다. 이번은 마지막으로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를 통해 은유와 직유라는 미술의 전쟁 기억법이 오늘날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미국 주요 기관이 몰려 있는 워싱턴의 공원 '내셔널 몰(national mall)'은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다. 내셔널 갤러리부터 스미소니언 박물관, 허시혼 미술관, 국립아시아미술관 등 대규모 미술관이 촘촘히 자리하고 있어 몇 날 며칠을 미술의 세계 속에 푹 빠져 지낼 수 있는 곳이라서다.
이러한 미술관들이 열을 지어 있는 대로를 따라 워싱턴 기념비 쪽으로 향하면, 미술이 가진 사회적 힘을 탁 트인 자연 속에서 한껏 느낄 기회를 만나게 된다. 워싱턴 기념비뿐만 아니라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 등 미국 역사를 기억하는 수많은 기념비와 기념관이 이곳에 몰려 있다.
바로 여기서 미술이 전쟁을 기념하는 두 방식, 즉 은유와 직유의 세계를 동시에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링컨 기념관을 바라볼 때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자리한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전쟁을 가리키는 어떠한 것도 배제한 채 조용한 침묵의 힘으로 우리를 이끈다. 왼쪽에 자리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직접적인 전쟁의 이미지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먼저 전쟁을 기념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는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살펴보자. 이곳은 계획 당시부터 논쟁 그 자체였다. 너무나 과거의 문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 기념비는 많은 기념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직적인 구조물이 아니다. 땅속에 파묻힌 듯 지하로 파고들어 가는 형태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더욱이 모름지기 기념물이라면 포함할 법한 조각이나 상징물 등 베트남전쟁을 가리키는 그 어떤 것도 배제되어 있다. 상공에서 내려다볼 때 'V자' 형태로 지어진 150m에 달하는 검은색 화강암 벽면에는 전사자의 이름만 전사한 시간 순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벽을 설계한 건축가는 중국계 미국인 마야 린이다. 1,42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모전에 당선될 당시 그는 21세에 불과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별다른 기억이 없는 무명의 아시아계 대학생에게 설계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논쟁이 크게 일었다. 그러나 1982년 11월 완성된 기념비가 공개되자 여론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기념비에는 5만8,000명이 넘는 전사자의 이름만 새겨져 있을 뿐이지만,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짚어나가다 보면 개인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Arther Danto·1924~2013)는 "기억하기 위해서는 모뉴먼트(monument·기념물)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메모리얼(memorial·기념비)을 세운다"고 말한 바 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의 영문 이름에 '메모리얼'이 들어 있는 만큼 한 명 한 명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전사자의 이름을 돌에 새겨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를 찾는 사람들은 화강암 돌에 각인된 전사자의 이름을 보다가 돌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이 이름과 겹쳐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놀란다고 한다. 관람객 중에는 전사자 이름을 손으로 만지거나 탁본을 뜨며 이들의 고귀한 죽음을 적극적으로 기억하려는 이도 있다. 이렇게 전사자를 호명하다 보면 죽은 이들이 산 자의 마음속에 부활하는 감동적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은유적 기념물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종전 7년 만인 1982년에 건립된 반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종전 32년 만인 1995년에 비로소 세워졌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가리킬 때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미국인 입장에서 한국전은 승리하지 못한 채 휴전으로 막 내린 전쟁으로, 굳이 기억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1982년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가 완공되자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1986년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건설이 시작됐다. 완공된 건 1995년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우뚝 선 성조기를 가운데 두고 '회고의 연못'이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형태다. 조각, 벽화, 전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명 등을 포함한다.
핵심으로 꼽히는 조형물은 ‘19인 용사상’으로 불리는 군인 조각상이다. 삼각형 모양의 야외 공간에 서 있는 군인 19명은 전장에서 수색하듯 대오를 갖추고 전진한다. 목표는 삼각형의 한 꼭짓점에 높이 걸린 성조기다.
조각상들은 성인 평균 키보다 약간 큰 2.1m 정도로,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 육군·해군·해병·공군의 복장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주기 위해 판초 우의를 입었다. 인종적으로도 배려해 인물은 백인, 흑인, 히스패닉계로 구성했다.
이 조각상을 제작한 건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조각가 프랭크 게일로드(Frank Gaylord·1925~2018)다. 그는 용사상을 대리석 등의 석재를 써서 2.4m 높이로 조각하려 했지만, 보존상 이유로 스테인리스 스틸로 주조됐고 크기도 다소 축소됐다. 용사는 원래 38명으로 기획되었지만 진행 과정에서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조각상과 나란히 서 있는 벽면에 조각상의 그림자가 반사되기 때문에, 모두 38명의 용사를 나타내려던 의도는 유지됐다. '38'이란 숫자는 38선에서 38개월간 싸운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기획 단계에선 용사들이 성조기를 향해 일렬로 행렬하는 모습이었지만 참전용사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수색하는 장면으로 변경됐다. 용사들의 간격도 실전처럼 3, 4m로 배치되었다. 원래의 도안은 우회적이고 간접적이었지만, 참전용사들이 기념비 제작과정에 참여해 도움말을 주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전쟁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이 강조됐다. 참전용사들은 판초 우의가 한국에서 겪은 혹독한 겨울을 연상시킨다고 하며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19인 용사상'이 향하는 성조기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들의 국가는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이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요청에 응답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기린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 never met)."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참전용사들의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내셔널 몰에 풀어내고 이들의 국가적 임무를 영속화해 이들을 시각적으로 예우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가 전사자에 대한 추모의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생존해서 귀환한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한국전 전사자 추모도 후속 공사로 갖춰지게 됐다. 2022년 높이 1m, 둘레 50m의 화강암 원형 벽면이 들어섰고 여기에 미군 전사자 4만3,808명(미군 3만6,634명과 카투사 7,174명)의 이름이 모두 새겨졌다.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는 이렇게 미술이 전쟁을 기억하는 은유와 직유의 방식을 모두를 갖춤으로써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에서 기념과 추모의 명확한 대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미술의 중요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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