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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있는 음악 연주한 조성진·임윤찬… 클래식과 일상 연결하는 '서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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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클래식 음악계의 여름은 비수기다. 세계 주요 공연장의 새 시즌이 시작되는 8월 말까지 음악가들은 음악 축제나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하거나 휴식기를 갖는다. 청중도 자연스럽게 공연장을 덜 찾게 된다. 음악가들의 활동 주기에 연동될 정도로 우리의 음악 감상은 의존적이고 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지금은 절판됐지만 음악인류학자 크리스토퍼 스몰의 '뮤지킹, 음악하기'라는 책이 있다. '뮤지킹'은 '음악'(music)이 명사형이 아닌 늘 움직이는 동사형 '음악하기'(musicking)여야 한다는 주장에서 나온 단어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 감상이 여러 이유로 일방적이고 수동적 상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음악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어야 하고 능동적이며 개인적 교류를 가져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한다. 음악을 유연하게 듣고, 읽고, 취하고, 경험할 수 있는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대상과 능동적 관계를 가지려면 서로에 대해 직접 경험하고 개인적으로 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표제가 없는 클래식 음악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잘 몰라서' 편하게 가까워지기 어렵다. 이 때문에 오랜 시간 음악을 듣고 취향을 가진 누군가의 식견에 의지하거나 전문가를 찾게 된다. 결국 일방적이거나 수동적인 관계가 되기 쉬운 것이다.
최근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의 리사이틀 투어가 있었다. 세계적 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상을 보이는 두 연주자는 공교롭게도 모두 표제적 성격을 지닌 프로그램을 구성해 연주회를 가졌다. 조성진이 선택한 라벨은 특정 인물이나 장면, 이미지와 움직이는 형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가득하다. 리스트의 모음곡 '순례의 해'(이탈리아)는 이탈리아의 햇빛과 풍경, 소네트(시)와 단테의 서곡(서사)이 있는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다. 임윤찬이 연주한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북반구 러시아 기후, 위도, 기압의 특징을 담아낸 12개월의 분위기를 그린다.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은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의 감정, 다른 그림을 보러 이동하는 인물의 걸음걸이, 마지막 작품 앞에 이르렀을 때 저 멀리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전시장 내 감상자에게까지 전달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공연 후 관객 반응이 흥미로웠다. 모두 기립 박수를 보낼 만큼 좋았던 연주회에 대해 각자 무엇 때문에 좋았는지, 제목을 언급하고 구체적 단어와 표현으로 감상을 나눴다. 더 많은 클래식 작품이 이런 정도의 이미지 묘사와 표제와 서사를 갖고 있다면 클래식 음악 감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능동적 형태로 바뀔 수 있을까.
같은 이유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 인상적인 장면에 등장한 음악에 대해서도 깊고 적극적인 대화가 오간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한때 금지곡이었지만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번지 점프를 하다'에 등장한 그의 재즈 모음곡 중 '왈츠'는 한 마디만 들어도 다음 마디를 흥얼거리게 될만큼 많은 이의 애청곡이 됐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사랑한 팬들은 슈만 '어린이 정경'의 '트로이메라이'를 '인생곡'으로 꼽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은 안 그래도 사랑받는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이 음악을 테마로 한 소설 앤솔러지 '음악소설집'을 펴냈다. 유명 작가가 특정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음악이 주목받는 경우가 많다. 김연수 작가의 '수면 위로'에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2022년 연세대 노천극장 야외 무대가 언급된다. 피아니스트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건반 위 풀벌레를 털어 내고 앙코르로 드뷔시의 '달빛'을 쳤다는 몇 개의 언급만으로도 작품 속 인물에게 감정 이입이 돼 버린다. 짧은 이야기지만 음악과 우리 일상이 얼마나 깊고 적극적으로 연결돼 있는지 새삼 알게 해 준다.
콘서트홀에서의 수동적 음악 감상과 달리 일상에 적극적으로 개입된 음악의 힘은 인생을 흔들기도 하고, 성장시키기도 한다. 음악은 어렵고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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