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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장인?" 옛말… '시급 4,000원' 불법체류자가 만든다

입력
2024.06.30 07:00
수정
2024.06.3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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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브랜드의 노동 착취]
이탈리아 경찰, 디올·밀라노 공장 수사
시급 4,000원 주고 불법 체류자 고용
업계는 코로나19 특수 누리며 호황
EU '공급망 실사법'으로 본사 책임 강화

올해 3월 13일 스위스 제네바에 새로 문을 연 디올 부티크 매장. 제네바=로이터 연합뉴스

올해 3월 13일 스위스 제네바에 새로 문을 연 디올 부티크 매장. 제네바=로이터 연합뉴스

디올, 조르지오 아르마니, 로로 피아나까지. 최근 명품 패션 브랜드의 노동 착취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집중 수사를 받아온 패스트패션 업계와 달리 명품 브랜드들은 '장인 정신' 이미지를 방패 삼아 수사망을 피해왔다는 비판이 나온다. 업계는 최근 코로나19 특수로 막대한 이익을 누렸으나 노동자 처우는 오히려 악화했다.

시급 4,000원 받고 하루 14시간 근무

이탈리아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가 올해 발견한 이탈리아 북부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하청 공장. 카라비니에리 제공

이탈리아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가 올해 발견한 이탈리아 북부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하청 공장. 카라비니에리 제공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크리스챤 디올은 이탈리아 밀라노 경찰의 수사로 노동 착취 정황이 적발됐다. 이달 10일 밀라노 법원은 디올 이탈리아 지사의 가방 제조업체 디올 SRL에 대해 하청업체의 노동착취를 방치·조장한 혐의로 '사법행정 예방 조치'를 명령했다. 법원이 임명한 사법행정관이 1년간 업체를 감시하게 된다.

판결문에는 밀라노 인근 지역 디올 하청업체 4곳의 운영 실태가 담겼다. 공장들은 주로 중국이나 필리핀에서 온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고 휴일 없이 24시간 공장을 가동했다. 작업실에는 감시 카메라를 달아놨다. 생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 제조 기계에서 안전장치도 제거했다. 재판부는 "이는 한 생산 라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화된 제조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가 올해 발견한 이탈리아 북부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하청 공장 기숙사. 카라비니에리 제공

이탈리아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가 올해 발견한 이탈리아 북부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하청 공장 기숙사. 카라비니에리 제공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하청업체도 비슷했다. 아르마니 패션그룹 자회사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오퍼레이션 SPA의 재하청업체는 불법 체류 중국인들을 고용해 시간당 2~3유로(약 3,000~4,400원)를 주고 하루 평균 10시간씩 일을 시키다 적발됐다. 밀라노 경찰이 공개한 영상엔 골판지로 막은 창문, 지저분한 화장실 등 직원 기숙사의 열악한 환경이 담겼다. 밀라노 법원은 아르마니사에도 지난 4월 사법 행정 예방조치를 내렸다.

최고급 캐시미어 제품으로 유명한 로로 피아나는 페루 원주민들을 착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로로 피아나는 페루 루카나스 지역에서 비쿠냐(낙타과 동물) 털을 공급받는데, 스웨터 한 장당 9,000달러(약 1,240만 원)에 팔면서 원재료 공급자들에겐 280달러(약 39만 원)만 지급했다. 페루 출신의 미국 캘리포니아 하원 의원 로버트 가르시아는 "소비자들은 자신이 사는 물건이 착취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며 모회사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하도급 문제 몰랐다" 꼬리 자르기

노동착취로 원가는 낮추고, 마케팅으로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한 덕분에 명품 판매가는 원가의 수십 배에 달한다. 원가 53유로(약 8만 원)짜리 디올백은 매장에서 2,600유로(약 385만 원)에 팔리고, 원가 93유로(약 14만 원) 아르마니 백은 1,800유로(267만 원)에 팔린다. 희소한 제품은 재판매까지 거쳐 더 비싸진다.

게다가 명품업계는 최근 코로나19 특수를 누리며 몸집을 불렸다. 해외여행을 비롯해 외출이 막히자 명품을 구매하며 만족하는 '보복소비'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 분석에 따르면 2020년 2,520억 달러(약 349조 원)였던 전 세계 100대 명품 브랜드 업체 매출액은 2021년 3,050억 달러(약 423조 원), 2022년 3,470억 달러(약 481조 원)로 뛰었다.

2019~2022년 세계 100대 명품 업체의 매출액. 그래픽=이지원 기자

2019~2022년 세계 100대 명품 업체의 매출액. 그래픽=이지원 기자

하지만 이익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공급망 윤리성·투명성을 감시하는 국제 비영리기구 '노우더체인'은 지난해 보고서를 통해 명품 브랜드들이 팬데믹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폭리를 취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간 글로벌 공급망 내 노동착취에 대한 비판은 주로 패스트 패션 업계에 쏠렸지만 명품 업계도 못지않다는 지적이다. 에이네 클라크 노우더체인 대표는 "럭셔리 업계는 비싼 가격, 유럽에서의 직접 공급, 장인 정신의 이미지로 조사를 피해왔다"고 짚었다.

이번 수사도 본사에 책임을 지우는 데에는 실패했다. 밀라노 수사당국은 아르마니사를 향해 "하청업체의 실제 근로 조건이나 기술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노동착취를 예방·억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본사는 "하도급 문제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성명을 내고는 처벌을 비껴갔다. 발각된 하청 공장에만 폐쇄 명령이 내려졌을 뿐이다.

본사 꼬리 자르기 겨냥한 '공급망 실사법'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깃발. 브뤼셀=AP 연합뉴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깃발. 브뤼셀=AP 연합뉴스

희망적인 건 국제 공급망 내 노동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4월 '공급망 실사법'(CSDDD·기업 지속 가능성 실사 지침)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모회사가 공급망 내 인권·환경 관련 부정적 영향 요인을 파악하고 위험 요인에 대해 예방· 완화· 제거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전체 매출의 최소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법안이 일찍이 도입됐다면 앞서 수사받은 명품 브랜드 하청업체의 본사에도 책임을 물었을 수 있다.

유럽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과인권네트워크 신유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한국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했던 '영원무역 사태'처럼 노동착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국외 공급망에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를 방지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14년 1월 방글라데시에 위치한 의류회사 영원무역 공장이 임금을 삭감하자 현지 노동자들이 반대 시위를 하다 진압에 나선 경찰의 실탄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변화 조짐은 보인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정태호 의원 등은 아시아 최초의 '공급망 실사법'인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인권·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회기 만료로 폐기됐지만 이번 국회에서 법안 발의를 다시 준비하고 있다. 'ESG 생존 경영' 책을 펴낸 법무법인 디엘지의 조선희 변호사는 "ESG 경영에서 친환경은 기본이고 노동자 인권까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기조가 바뀌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도 근로조건 정비·안전보건 강화 등의 방안으로 대응해나가야 한다"고 짚었다.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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