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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죽고 고독사 걱정하는 80대… 미국도 ‘노인을 위한 나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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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州) 북부 페어팩스카운티 옥튼의 한 타운하우스 단지. 미국 교외에 흔한 타운하우스는 밀도가 단독 주택과 아파트의 중간쯤 되는 주거 형태다. 비슷하게 생긴 2, 3층짜리 주택 여러 채가 벽을 공유하며 붙어 있다. 통상 10~50채가 한 단지를 이룬다. 수도 워싱턴에서 서쪽으로 약 25㎞ 떨어진 옥튼은 2022년 기준 3만6,000여 명이 사는 소도시다. I-66번 도로를 타면 차로 40분쯤 걸리는 수도의 직장으로 거주민 상당수가 통근한다.
여느 금요일답게 한가한 오후였다.
“사고가 난 것 같아! 도와줘!”
인도계 주민 아누가 외쳤다. 40대 여성인 그의 직업은 의사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던 어른 두서넛이 급히 한 집 뒷마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넘어져 화단에 처박힌 백인 할아버지 빌의 거구를 아누가 부축하려 하고 있었다. 여럿이 들러붙어 간신히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의자에 앉혔다. 아누가 바이털 사인(활력 징후)을 체크했다. 다행이었다. 30분쯤 지나자 빌은 스스로 일어났다.
빌은 80대 독거노인이다. 20년 넘게 이곳에 혼자 살았다. 자녀들이 있지만 중서부에 산다. 매년 늦가을 추수감사절에나 한 번씩 부친을 보러 온다. 반려견을 키울 때는 하루 서너 차례씩 동네를 산책하던 빌이었다. 지난해 개가 죽은 뒤부터 집에 틀어박혔다.
이날도 혼자였다. 잡초를 뽑고 있었는데, 얼마 전 먹기 시작한 약이 현기증을 일으켰다. 쓰러지며 지른 비명을 운 좋게 의사 아누가 들었다. 천운으로 주변에 도울 사람도 많았다. 발견되지 않고 응급 조치 없이 몇 시간이라도 흘렀다면 그의 생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
사고 뒤 빌은 학교에서 돌아온 애들이 모여 놀 때쯤이면 한 번씩 집 밖으로 나온다. 이웃도 “괜찮냐”고 그에게 묻는다. 저녁에 그의 집에 불이 켜지는지, 아침에 그가 우체통을 살피러 나오는지, 관심을 더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고독사 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다. 60대 이웃 할머니 이디는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게 독거노인 운명”이라고 말했다. 계단으로 3개 층을 오르내려야 하는 가옥 구조도 노인에게 불편하고 아슬아슬하다. 그래서 노인 전용 시설에 입주하거나 단층 주택으로 이사하라고들 권한다. 여생을 자녀와 보내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빌도 고민 중이다. 그러나 일단 돈이 문제다. 신축 소형 주택은 드물고 비싸다. 고금리 탓에 주택담보대출(모기지)도 버겁다. 이제 와 애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도 않다. 가장 싫은 것은 변화다. 빌은 “이사하면 새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익숙한 곳에서 지금처럼 혼자 사는 게 아무래도 편하다”고 말했다. 이디는 “우리는 좋은 이웃이지만 빌이 고집을 피우면 가끔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자녀의 부양을 받으며 가족이나 친척과 함께 사는 게 세계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노년의 삶이다. 2020년 3월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공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60세가 넘는 전 세계 노인 10명 중 4명(38%)꼴로 자기 배우자와 성인 자녀, 며느리나 사위, 손자, 조카 등과 한 가구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대가족에 속한 노인은 6%에 불과하고, 거의 절반(46%)이 배우자나 파트너와 집을 공유하는 커플 형태였다.
혼자 사는 노인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독거 비율이 27%나 됐는데, 이는 세계 평균(16%)보다 10%포인트 넘게 높은 수치다. 아프리카나 아시아·태평양은 해당 비율이 10% 안팎에 그쳤다. 유럽(28%)만 미국을 능가했다. 미국 인구조사국이 지난달 말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2022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의 독거 비율은 28%에 달했다.
이런 차이는 주로 국가 간 경제력 격차에서 비롯된다는 게 퓨리서치센터 설명이다. 빈국에서는 곤란한 노년의 재정적 독립이 미국 같은 부국에서는 실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화 요인이 포개진다. 핵가족이다. 미국의 경우 고교 때까지만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는 게 일반적이다. 대학 진학과 취직은 아예 부모 거주지와 다른 주에서 하기 일쑤다.
요즘 들어서는 가뜩이나 많은 독거노인이 더 늘고 있다. 세대가 내려가며 달라진 결혼관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1946~64년생)와 바로 뒤 X세대(1965~80년생)는 이혼·별거하거나 결혼하지 않을 가능성이 이전 세대보다 크다는 게 인구사회학자들 얘기다. 당연히 자녀도 적거나 없다. 특히 사회 진출이 본격화한 여성의 변화 폭이 가팔랐다. 더욱이 이들 세대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를 차지하는 인구 집단이기도 하다. 이미 베이비붐 세대가 전부 60세를 넘겼고 내년부터 X세대가 60대로 진입한다.
지난해 8월 미국 CNN방송은 독거노인 증가의 핵심 배경으로 ‘황혼 이혼’을 조명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볼링그린주립대 연구팀은 1990년과 2010년 사이에 50세 이상 부부 이혼율이 두 배가 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4.9→10.1%). 65세 이상으로 범위를 좁힐 경우 증가 폭은 더 커졌다(1.8→4.8%). 이혼 전문 변호사 수전 마이레스는 CNN에 “80대 고객마저도 남은 인생이 정말 소중해 더는 잘못된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없다고 고백하곤 한다”라고 전했다.
문제는 독거가 노인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2021년 영국 옥스퍼드대 학술지 ‘연령과 노화’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혼자 사는 노인은 사망 위험이 더 크다. 일단 사고나 낙상을 당했을 때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마땅치 않다. 외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우울증과 불안을 야기하고 인지 저하마저 가속화할 수 있다.
신체와 정신 능력 감퇴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더는 자기 힘만으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은 노인의 자존감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노인 정신과 의사인 마크 네이선슨 박사는 4월 홈페이지에 “혼자 해내는 게 성취감을 주겠지만 노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탈(脫)고립과 안전과 건강”이라고 조언했다.
전통적으로 가족이 수행해 온 돌봄 기능을 친구와 이웃이 얼마간 대신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완전 대체는 불가능하다. 캐나다 웨스턴온타리오대 레이철 마골리스 교수(사회학)는 2022년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친구나 이웃이 식사를 돕거나 처방전을 받아 줄 수는 있어도 샤워할 때까지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성인 자녀는 배우자와 함께 핵심 노인 간병인이다. 베이비붐 세대부터는 자녀 수가 급감한다. 가족 부양이 갈수록 제한되는 이유다.
우선 대안은 장기 요양 서비스다. 노인의 70% 가까이가 이 서비스가 필요하리라고 대답했다는 게 하버드대 주택연구공동센터 조사 결과라고 지난해 12월 미국 온라인매체 액시오스가 전했다. 그러나 비용이 큰 걸림돌이다. 제니퍼 몰린스키 센터 고령화 사회 주택 프로그램 책임자는 액시오스에 “대부분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모자란 간병인도 장애물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기간 많이 그만뒀다. 진보 성향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벤 해리스 부원장은 4월 보고서에서 간병인 부족 문제 해법으로 이민을 제시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급증한 불법 이민자 때문에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다. 반려·돌봄 로봇 시장의 성장세가 시작됐다지만 당장 상용화는 어려워 보인다.
독거노인은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주택 불일치다. 4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침실이 3개 이상인 미 주택의 28%가량을 베이비붐 세대 독거노인이나 부부가 소유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전했다. 1981년 이후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어린 자녀가 있는데도 비율이 약 14%에 그쳤다. 공급 부족으로 뛴 집값과 고금리 국면에 치솟은 모기지 금리가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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