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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계고생은 대학에, 과학고생은 의대에... 사회 혁신·충원 기능 잃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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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 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 "특성화고 3년간 회계과에서 공부했는데, 졸업이 다가오니 학교에 연계 일자리로 영화관에서 티켓 끊어주는 직원이나 자동차 파는 딜러가 들어오더라고요. 전공과 아무런 관련 없고 가고 싶은 괜찮은 일자리도 전혀 아닌 거죠." 3년 전 특성화고를 졸업한 신수연(22)씨는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최저임금 수준 계약직 등으로 너무 열악하다 보니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며 "학교가 졸업 후 인생을 책임져 주지도 않으니 불안한 마음에 전문대 원서를 많이 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과학고 동기생 중 의대에 간 사람은 저 빼고 거의 없었어요. 공대 다니다가 반수한 동기 정도였죠. 그런데 '의치약(의대 치대 약대)'으로 넘어오는 친구들이 해마다 늘더니, 지금은 동기 100명 중 15명은 되는 것 같아요." 정해린(가명·27)씨가 8년 전 과학고를 졸업할 때만 해도 동급생 대다수는 '과학기술 인재'가 되고자 이공계에 진학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돌고 돌아 의약 계열 전공자가 됐다. 정씨는 "친구들 말이 대학원 생활이 기대와 다른 데다 힘들고 페이(임금)도 적어 안정적 직업을 갖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더라"고 전했다.
인재를 양성해 각 분야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는 역할은 교육의 매우 현실적이고도 필수적인 기능이다.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중학교까지 보편적인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의 적성에 맞는 교육을 본격화하며 이 같은 '사회 충원' 기능을 수행한다. 일반고와 더불어 직업교육에 특화된 특성화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과학고·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 수월성·다양성 교육을 지향하는 자율형 사립고 등이 공존하는 이유다.
1980년대 중반과 2000년대 초에 각각 도입된 특목고와 자사고는 그러나 명문대와 의대 진학을 우선시하는 '입시기관화'됐다는 지적을 받은 지 오래다. 특성화고 또한 대학 진학률이 취업률의 2배를 웃돌면서 산업인재 양성이라는 본래 취지에서 한참 멀어졌다.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노동시장에서 몸값이 높아진다는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에서 비롯한 결과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청년의 70%가 대학을 나왔는데 정작 일자리의 80%는 대졸자가 취업을 꺼리는 중소기업에 있는 '미스매치' 상황을 빚어낸다. 전문가들이 교육개혁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임금격차 해소, 좋은 일자리 창출과 같은 노동시장 개혁을 병행해야 할 과제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중등 직업교육기관인 특성화고는 학생에게 다양한 진로 선택권을 보장하면서 중소기업 등 산업 일선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지만 현실은 그와 거리가 멀다. 교육부에 따르면 2022년 특성화고 졸업생(6만7,480명) 중 절반(47.7%)이 대학 진학을 택했고, 취업자는 27.1%뿐이었다. 절반 이상(52.4%)이 취업했던 2017년과 비교하면 '반토막'이고, 그마저 취직 후 1년 내로 그만둔 비율이 세 명 중 한 명꼴(35.6%)에 달했다.
고교 직업교육이 파행을 겪는 이유로는 '전문성 부족'이 첫손에 꼽힌다. 현재 전국특성화고노조에서 활동 중인 신씨는 "사무관리 수업이면 실제로 회사에서 쓸 법한 프로그램을 응용해 가르치는 게 아니라, 정보기술자격(ITQ) 자격증을 따는 데 필요한 한글·파워포인트·엑셀 프로그램 기초만 3년 내내 가르치는 식"이라고 말했다. 또 3D 프린터 같은 신기술이 주목받으면 학과를 개편하지만, 간판만 바뀔 뿐 가르치는 교사도 교과과정도 거의 그대로였다고 전했다.
이렇다 보니 직업계고 상황은 소수 마이스터고를 제외하면 열악해지는 추세다. 특성화고의 2022년 입학생은 2012년 대비 47% 급감했다. 학령인구 감소를 감안해도 같은 기간 일반고 입학생이 29% 줄어든 것과 차이가 뚜렷하다. 대학 진학률은 오르고 취업률은 떨어지는 가운데, 취업도 진학도 하지 않은 채 졸업한 비율도 2017년 16.7%에서 2021년 26.4%로 10%포인트 가까이 늘었다.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한 수월성 교육 역시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진단이 많다. 단적인 예로 대학정보공시 사이트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과학고 외고 국제고 영재학교 자사고 출신이 열 명 중 네 명꼴(38.96%)이었다.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입학하는 대학이라고 해도, 특목고·자사고 학생이 전체 고등학생의 5% 안팎인 점을 고려하면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이런 이유로 진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들 학교는 고교 서열화와 사교육 과열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돼 폐지가 추진됐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특성화고 졸업생은 '고졸 딱지'가 무서워 일단 대학부터 가고, 국가경쟁력을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고자 도입된 특목고는 '명문대 준비반'으로 전락한 이유는 결국 우리 노동시장의 학력 프리미엄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대기업·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 간 임금·처우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엄존하다 보니 가급적 대학 졸업장을 손에 넣어 '안전지대'에 안착하려 하고 이로 인해 사교육 지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는 '학력 과잉'이라는 사회적 낭비로 이어진다. 2019년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4년제 대졸자가 고졸 이하 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에 취직하는 '하향취업'은 2000년대 초부터 줄곧 증가해 30%를 상회한다. 지난해 국내 대학 진학률은 76.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하위)80 대 (상위)20' 구조인 노동시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교육 과열 등 교육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요원하다"며 "임금 격차와 고용 안정성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대입 정책이든 공교육 강화 정책이든 교육 정책만으로는 사교육을 줄일 수 없다"며 "소득 양극화 해소, 사회 보장 정책 등이 함께 이뤄져야 '자식을 서울대에 입학시켜 보험 들겠다'는 학부모들 생각이 깨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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