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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조력사 찬성 70% 달하지만… 연명 치료 중단 문턱은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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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주변에 암 환자들 있잖아요. 항암 치료 다시 받아야 한다면 80%는 안락사 선택하고 싶다고 말해요.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안락사는 구원 같은 거예요."
박모(61)씨는 2014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12번의 항암 치료를 견뎌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을수록 죽음보다 치료에 대한 공포가 더 커졌다.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멀미의 1,000배 정도 구역질과 어지러움증, 그리고 온몸이 따끔거리는 고통이 사나흘간 지속됐다. 7번째 항암 치료 때부터는 공황장애까지 찾아왔다. 숨도 못 쉬고 죽을 것 같은 공포 탓에 침대 시트가 식은땀으로 다 젖기도 했다.
박씨는 5년 전 의료조력사 절차 등을 물어보려고 스위스 조력사망 단체 '디그니타스'와 '페가소스'에 연락했다. 의료조력사란 의사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고통 없이 사망할 수 있도록 독극물을 처방하고 환자 스스로 주입해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항암 치료를 받았던 박씨는 늘 의료조력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서울의 암전문병원 6인실에 입원하며 환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목격했다. 절망, 공포, 고통과 싸우다 무너졌던 환우들의 눈빛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박씨는 "저런 죽음은 싫다"고 몇 번을 되새겼다. 하지만 한국에선 안락사나 의료조력사가 불가능해 온몸으로 고통을 견디다 죽어야 한다.
항암 치료의 고통을 뼛속까지 느껴본 박씨에게 지난해 또다시 암이 찾아왔다. 6개월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박씨는 12월 검사를 앞두고 있다. 여기에 유방암이 재발될지 모른다는 공포도 박씨의 심장을 짓누른다. 유방암은 유방 밖으로까지 퍼져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악성 종양이기에, 그는 매년 전신 검사를 하며 기도를 한다.
"우리나라에 꼭 의료조력사가 허용됐으면 좋겠어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남은 삶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대하는 분들이 많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분들이 나 대신 아프거나 고통을 일부라도 가져갈 수는 없잖아요."
내년에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 20% 이상) 진입을 앞두고 의료조력사(조력존엄사)를 허용해 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음의 질이 낮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표출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일보가 창간 70주년을 맞아 웰다잉문화운동·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2,015명을 대상으로 웰다잉 인식과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10명 중 7명은 의료조력사(조력존엄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극 반대하는 이들은 10명 중 1명에 그쳐 90%는 조력사를 사실상 반대하지 않았다. 이번 조사는 5대 권역별 인구비례를 고려해 대상자를 선정했고, 웹(WEB) 설문지로 온라인·모바일 조사를 병행했다.
우선 ①'우리나라는 사회·문화·제도적으로 임종 선택권이 자유로운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23%만 '그렇다'고 답했다. '자유롭지 않다'가 52%, '보통이다'는 25%로 조사됐다. 10명 중 7명은 임종을 앞두고 자기결정권이 부족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임종 직전의 삶은 천편일률적이다. 지난해 사망한 10명 중 8명(75.4%)은 병원에서 삶을 마감했고, 집에서 사망한 사람은 15.5%에 그쳤다. 죽음을 앞둔 한국인 대부분은 여전히 병원에서 임종 직전까지 죽음과 맞서 싸우다가 사망했다는 의미다.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6년이 지났지만 연명의료 중단으로 사망한 이들은 17.3%(2022년 기준)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42%만 사망자가 임종 직전 결정했고, 58%는 가족이 선택했다.
오랫동안 임종기 환자를 돌보며 한국인의 죽음을 지켜본 윤영호 서울대병원 휴먼시스템의학과 교수는 "한국인의 죽음의 질은 100점 만점 중 30점"이라고 평가했다. 임종기 환자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학적 극복 대상으로 여기면서, 환자 스스로 어떻게 죽을지에 대한 고민과 선택권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연명의료결정법은 시기와 대상자를 죽음이 임박한 임종기로 제한해 자연적 죽음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며 "사망 한 달 전에 지불하는 의료비는 전체 의료비의 30~40%에 달한다. 말기 환자들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무의미한 의료행위를 받다가 사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②'의료조력사가 허용돼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68%가 '그렇다'고 답했다. '보통이다'는 22%, '그렇지 않다'는 10%에 그쳤다. 특히 고령일수록 의료조력사 찬성 비율이 높았다. 40대는 59%가 찬성했지만, 50대는 찬성 비율이 71%로 높아졌고, 60세 이상은 76%에 달했다. 나이가 들수록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면서 의료조력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에게 의료조력사를 허용하는 스위스 방문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3명을 비롯해 현재까지 한국인 7명이 디그니타스(조력사망 단체)의 도움을 받아 사망했다. 디그니타스에 가입한 한국인 회원은 2018년 32명에서 지난해 162명으로 5배 이상 증가했다.
말기 암 환자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해온 79세 여성도 지난해 디그니타스에서 의료조력사 승인을 의미하는 '그린 라이트'(Green Light)를 받았다. 디그니타스는 임종을 앞둔 말기 환자가 죽음에 대한 의사를 명확히 표시하면 외국인에게도 의료조력사를 허용한다. 이 여성은 2009년 유방암 진단을 받아 항암 치료와 수술을 견뎌냈지만, 2020년 암이 뼈로 전이됐다. 날 선 칼이 뼈마디 마디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은 환자의 삶의 질을 추락시켰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항암 부작용도 견디기 힘들었다. 독한 마약성 진통제를 썼지만, 효과는 두 시간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임종을 돕는 호스피스 병원을 알아봤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고 보름 뒤에는 퇴원해야 된다는 말에 포기했다.
이 여성은 결국 딸에게 스위스에 가고 싶다고 했다.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 남유하씨는 모친의 의료 기록 등 조력사에 필요한 서류를 디그니타스와 수차례 주고받은 끝에 스위스에 와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남씨는 한국일보에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끝낼 방법이 죽음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이런 고통을 겪는 환자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희망"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의료조력사 입법 움직임이 없는 건 아니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2년 6월 조력존엄사법을 발의했다. △말기 환자 △극심한 통증 △명확한 의사 등 3가지 조건을 갖춰야 신청할 수 있고, 정부가 구성한 심사위원회 논의를 거쳐 허용하자는 취지다. 다만 지난달 21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면서 법안은 자동 폐기됐다. 하지만 안 의원은 이번 22대 국회 때 관련 법안을 다시 발의할 계획이다.
헌법소원도 진행 중이다. 척수염으로 하반신 마비와 환상통에 시달리는 이명식(63)씨와 이씨의 딸(36)은 지난해 12월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씨 부녀는 연명의료결정법에 의료조력사를 허용하는 구체적 방안을 담지 않은 건 헌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딸이 아버지의 의료조력사를 도울 경우 자살방조죄로 처벌받게 되는데, 이 역시 △자기결정권 △행복추구권 △행복자유권 △사생활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취지의 헌법소원 청구가 2017년과 2018년에 모두 각하됐지만, 헌법재판소는 올해 1월 '심판 회부'를 결정했다. 이번엔 정식으로 한번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이씨의 소송 대리인인 사단법인 착한법만드는사람들의 김현 대표(전 대한변호사협회장)는 "혹시 자신의 의사에 반해 가족에게 떠밀려 사망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여러 장치로 충분히 걸러낼 수 있다"며 "잘못될 우려를 근거로 조력존엄사 도입을 거부하는 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그나마 국회가 나서서 법안을 발의했지만 정부는 전혀 관심이 없다"며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죽음을 지원하는 법'의 골자를 발표했듯, 우리나라에서도 법안이 통과되려면 대통령이 어젠다를 제시하고 움직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반대 입장도 분명하다. 의료조력사 허용은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인에게 손쉬운 '탈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경시 풍조 확산 △빈곤 노인의 경제적 자살 △현대판 고려장 등도 걱정거리다. 20년간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여러 죽음을 목격해 '그렇게 죽지 않는다' 책을 쓴 홍영아씨는 의료조력사에 대해 '판단 중지'라고 했다. 의료조력사가 갑작스럽게 이슈화해 합법화되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홍씨는 "우리는 임종에 가까운 사람과 솔직하고 건강하게 대화하는 법에 대해 훈련받지 않았고 사회적 분위기도 성숙하지 않다"며 "부모들은 더 오래 살고 싶은데 체면에 짓눌려 안락사를 선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우려 탓인지 ③'30년 뒤 우리나라에 의료조력사가 허용되겠느냐'는 질문에 53%만 '허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의료조력사가 허용돼야 한다(68%)는 의견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허용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이들은 22%였다. ④의료조력사가 허용됐을 때 이용할 의향이 있다는 응답자는 59%로 조사됐다. 31%는 더 알아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했고, 11%는 이용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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