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현장] "이 나이에 딴 일 못 찾아"... 땡볕 노동 못 멈추는 노인들

입력
2024.06.14 04:30
수정
2024.06.14 09:30
10면

더 더운 올여름 온열질환 주의보
전단지, 폐지, 택배 종사자를 위협
자치구마다 스마트 쉼터 격차도 커

12일 낮 12시 서울 동작구에서 만난 어윤학(91)씨가 폐지를 줍고 있다. 이날 어씨는 오전 4시에 집에서 나와 상가와 주택가에서 나온 폐지를 수집했다. 전유진 기자

12일 낮 12시 서울 동작구에서 만난 어윤학(91)씨가 폐지를 줍고 있다. 이날 어씨는 오전 4시에 집에서 나와 상가와 주택가에서 나온 폐지를 수집했다. 전유진 기자


"요새 날씨에 나 같은 노인들 한낮에 돌아다니면 큰일 나요. 금방 쓰러질 걸요?"

12일 낮 12시,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작열한다. 서울 동작구의 한 골목에서 폐지를 줍던 어윤학(91)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기온은 30도를 넘었지만 리어카를 멈출 순 없다.

어씨가 폐지를 줍기 시작한 건 어언 10년째. 자식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아 시작한 일이다. 이 일에 이골이 났지만, 그도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지 리어카를 두고 잠시 그늘 아래에서 쉰다. 이렇게 폐지를 주워 넘기면 얼마나 버나요? "하루 7,000원에서 8,000원? 날이 더우니까 요새는 새벽 4시면 집에서 나와요. 중간중간 그늘에서 쉬어가며 일하는 수밖에 없어요."

빠르게 찾아온 무더위

예년보다 무더위가 빠르게 찾아왔다. 10일 올여름 첫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는데, 이건 작년(6월 17일)보다 일주일이나 빠른 기록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측되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폭염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온열질환 예방 대책 마련에 여념이 없다. 고용노동부는 전국 공공기관과 사업장에 단계별 대응조치 등을 담은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를 배포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횡단보도 그늘막과 스마트 쉼터를 추가로 설치하는 등 폭염종합대책을 가동했다.

12일 오후 서울 동작구의 기온을 가리키는 전광판에는 30도가 적혀 있었다. 전유진 기자

12일 오후 서울 동작구의 기온을 가리키는 전광판에는 30도가 적혀 있었다. 전유진 기자

그러나 노년층의 경우 아무리 온열질환을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이가 들면서 체온조절 능력이 떨어지고, 땀샘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의 '온열질환 응급실감시체계' 운영 결과를 보면, 지난달 20일부터 3주 동안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 1명을 포함해 총 72명의 환자가 신고됐는데 이 중 65세 이상이 26.4%로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 구직활동이 어려운 노인들은 폐지 줍기, 지하철 택배, 전단지 돌리기 등 야외 노동을 하며 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12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영등포구청역 역사 내에서 지하철 택배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 배송 시간을 맞춰야 한다며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태연 기자

12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영등포구청역 역사 내에서 지하철 택배 일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 배송 시간을 맞춰야 한다며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김태연 기자


땡볕에 노출된 노인들

땡볕 노동을 피하라는 권고가 있지만, 정해진 시간에 일을 완수해야 하는 경우 특정 시간에 쉬어가며 일하기란 쉽지 않다. 지하철을 이용해 물건을 배송하는 노인들은 고정된 시간대에 역사에 모여 저마다 봉투에 적힌 주소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만난 지하철 택배원 A(77)씨는 "최근 기온이 높아지면서, 분류 작업을 하다 보면 역사 내부에서도 땀이 뻘뻘 난다"고 전했다. 옆에 있던 B씨 역시 "이동 중에는 바닥에 잠시 짐을 내려 놓을 수 있지만 자리에 앉아서 가는 경우는 드물다"며 "더위는 그야말로 고역"이라고 말했다.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지하철역 출구 인근에서 강모(80)씨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강씨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와 건식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김태연 기자

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지하철역 출구 인근에서 강모(80)씨가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강씨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챙이 넓은 모자와 건식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김태연 기자

일 특성상 그늘 아래에서만 근무하기 어려운 이들도 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강모(80)씨는 쉼 없이 햇볕과 그늘 사이를 오갔다. 강씨는 "전단지를 나눠주려면 그늘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서 "두 시간만 일해도 온몸이 땀범벅이 돼 집에 들어가면 바로 샤워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하러 나올 때 꼭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집에서 얼음물을 가지고 온다. 그래야만 더위와 갈증으로부터 견뎌낼 수 있다. 다른 일자리를 구해보시진 않았나요? 그 물음에 강씨는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은 써주는 데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11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스마트 쉼터 내부. 이날 낮기온은 31도에 육박했지만 냉방이 되는 쉼터 안은 쾌적했다. 김태연 기자

11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스마트 쉼터 내부. 이날 낮기온은 31도에 육박했지만 냉방이 되는 쉼터 안은 쾌적했다. 김태연 기자


쉼터 인프라도 지자체별 천차만별

야외에서 일하는 노인들이 잠시나마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스마트 쉼터'가 있지만, 막상 고령 인구 비율이 높은 자치구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스마트 쉼터는 각 자치구에서 폭염 등에 대비해 만든 폐쇄형 냉방 부스다. 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가 23%를 차지하는 도봉·강북구에 설치된 스마트 쉼터의 개수는 각각 6개와 2개인 반면, 고령 인구 비율이 낮은 성동구(17%)에는 53개가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자치구마다 예산 상황이나 정책적 판단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야외에서 일하는 노인 인구의 온열질환을 방지하기 위해선 공공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업무시간 변경이 어렵더라도 햇볕이 가장 강한 정오에서 오후 2시 사이만이라도 업무를 중단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혜지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역시 "노인들에게 적합한 공공 일자리가 확대되거나 폭염 대피시설이 추가 설치돼야 한다"며 "근본적으로는 노년층의 소득이 보장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태연 기자
전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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