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청소부 노린 연쇄 성폭행... 워싱턴 검찰은 왜 '아무개'를 기소했나

입력
2024.06.14 04:30
수정
2024.06.14 11:17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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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워싱턴 등 수도권 호텔 연쇄강간
1998~2006년 청소부 6~9명 성폭행
현장 증거 즐비한데도 범인 못 잡았다
공소시효 만료 직전 승부수 띄운 검찰
"이 'DNA' 가진 아무개를 기소합니다"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워싱턴 인근 호텔 여러 곳에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연쇄강간을 저지른 용의자의 몽타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졌다. 왼쪽은 2003년 그려진 몽타주, 오른쪽은 2018년 나이와 일부 DNA 정보 등을 반영해 다시 그려진 몽타주. FBI 홈페이지 캡처

워싱턴 인근 호텔 여러 곳에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연쇄강간을 저지른 용의자의 몽타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졌다. 왼쪽은 2003년 그려진 몽타주, 오른쪽은 2018년 나이와 일부 DNA 정보 등을 반영해 다시 그려진 몽타주. FBI 홈페이지 캡처

"이 남성은 10년 가까이 워싱턴 지역 여성들을 먹이로 삼았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공식 지명 컬럼비아특별구. 평화롭고 정돈된 인상의 도시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2018년 컬럼비아특별구 메트로폴리탄 경찰서장이었던 피터 뉴셤의 말을 빌리면, 8년간 여러 여성을 '집어삼킨' 연쇄강간범의 그늘이 드리웠던 곳이기도 하다.

범행이 멈춘 지 약 20년이 흘렀지만 아직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알려진 범인의 이름은 하나뿐이다. '존 도(John Doe·미국에서 신원미상의 남성을 일컫는 표현)'. 한국식으론 '아무개'인 셈이다.

8년간 이어진 강간… 끝내 못 잡았다

1998~2006년 워싱턴 인근 수도권(컬럼비아특별구·메릴랜드·버지니아) 연쇄강간 사건이 일어난 위치. 빨간색은 DNA 증거를 통해 동일인의 소행임이 입증된 범죄(6건), 파란색은 범인의 DNA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수법과 범인 인상착의 등이 유사해 동일인으로 의심되는 범죄(3건) 또는 용의자 추정 인물 목격(5건) 지점. FBI 홈페이지 캡처

1998~2006년 워싱턴 인근 수도권(컬럼비아특별구·메릴랜드·버지니아) 연쇄강간 사건이 일어난 위치. 빨간색은 DNA 증거를 통해 동일인의 소행임이 입증된 범죄(6건), 파란색은 범인의 DNA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수법과 범인 인상착의 등이 유사해 동일인으로 의심되는 범죄(3건) 또는 용의자 추정 인물 목격(5건) 지점. FBI 홈페이지 캡처

1998년에서 2006년, 8년간 워싱턴 인근 수도권(컬럼비아특별구·메릴랜드·버지니아)에서 그와 관련된 사건은 총 14건이다.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그가 저지른 것이 확인된 성폭행이 6번, DNA 확인은 안 됐지만 증언과 수법으로 보아 그의 소행이 유력한 범행이 3번, 그로 추정되는 수상한 인물이 목격된 건이 5번이었다.

범행 수법은 거의 비슷했다. 그는 ①오전 10시 30분~오후 3시 30분 사이 ②빈 호텔 객실에서 ③청소부를 노렸다. 범인 소행이 확실한 6건의 범죄 중 차량에서 저지른 한 건을 제외하면, 그의 범행 장소는 늘 호텔이었다. 그는 5번 모두 호텔에서 청소 중이거나 곧 청소할 객실에 들어가 문과 커튼을 닫고, 객실을 청소하러 온 청소부를 성폭행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20~30대였으나 60대 청소부도 있었다.

워싱턴 부근 호텔 연쇄성폭행범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강준구 기자

워싱턴 부근 호텔 연쇄성폭행범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사건. 강준구 기자

범인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범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때로 칼끝을 겨누며 피해자를 위협했고, 무자비한 폭행으로 다치게 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공통점이 있다며 "그는 피해자들을 때리고 던진다. 그들은 강간당할 뿐 아니라 부상도 입는다"는 경찰의 말을 보도했다.

DNA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의 소행으로 보이는 유사 사건도 세 건 있었다. 같은 시기 그가 범행을 저지르던 지역인 버지니아·메릴랜드의 호텔에서 낮 시간대에 비슷한 수법으로 성폭행이 연달아 일어났다. 범인 용모에 대한 증언도 흡사했다.

이 외에도 같은 시간대에 인근 호텔에서 그로 추정되는 인물이 여러 층에서 객실 문을 열려고 애쓰다 도주했다거나, 수상하게 어슬렁댔다는 등의 목격담도 다섯 건이 나왔다. 그렇게 목격된 지 15분 만에 근처 호텔에서 그의 DNA가 발견된 성폭행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미국 수도 워싱턴(컬럼비아특별구)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수도 워싱턴(컬럼비아특별구)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범인에 관한 단서는 많았다. 여러 호텔을 기웃댄 만큼, 그와 마주친 사람도 여럿이었다. 증언이 모였고, 일부 DNA 정보도 활용했다. 종합해보면 이랬다. 20, 30대로 보이는 흑인 남성, 갈색 눈에 검은 머리카락의 소유자. 170~178㎝ 키에 몸무게는 약 81~95㎏, 평범하거나 조금 다부진 체격. 마약중독자는 확실히 아닌 듯 보이고, "직장인인 듯 단정한 옷차림". 그가 검은색 닛산 센트라 차량을 몰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FBI 워싱턴 사무소 한 요원은 "범인은 호텔의 일과와 운영 방식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가 범행을 저지른 시간은 손님이 비교적 적고, 호텔 직원이 청소를 위해 객실을 드나드는 낮 시간이라는 이유에서다.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도 적지 않았다. 2002년 12월 1일 사건에서는 그의 검은 베레모와 그가 피해자를 위협할 때 썼던 붉은색 커터칼이 현장에서 수거됐다. 커터칼 겉면에는 '데비(Debbie)'라는 이름이 휘갈겨져 있었다. 2003년 5월 11일에는 피해자가 범인으로부터 떼어낸 반지가 수거됐는데,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집안의 가보쯤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6건의 성폭행 사건을 연결해 준 범인의 DNA 정보가 있었다.

2002년 12월 1일 메릴랜드주 호텔 성폭행 사건에서 범인이 피해자를 위협할 때 쓴 붉은색 커터칼. 검은 잉크로 '데비(Debbie)'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FBI 홈페이지 캡처

2002년 12월 1일 메릴랜드주 호텔 성폭행 사건에서 범인이 피해자를 위협할 때 쓴 붉은색 커터칼. 검은 잉크로 '데비(Debbie)'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FBI 홈페이지 캡처


2003년 5월 11일 워싱턴 호텔 성폭행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반지(위 사진), 2002년 12월 1일 메릴랜드주 호텔 성폭행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검은색 베레모. FBI 설명에 따르면, 조사관들은 반지 문양이 독특해 가족의 가보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FBI 홈페이지 캡처

2003년 5월 11일 워싱턴 호텔 성폭행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반지(위 사진), 2002년 12월 1일 메릴랜드주 호텔 성폭행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검은색 베레모. FBI 설명에 따르면, 조사관들은 반지 문양이 독특해 가족의 가보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FBI 홈페이지 캡처

그럼에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목격자와 증거가 넘쳤던 데 비춰보면 납득하기 어렵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벌어진 범죄였던 탓에 기술적 한계가 컸다고 FBI는 설명한다. 이 사건의 조사는 지역 경찰이 맡았지만, 용의자 행동 분석 등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FBI가 지원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FBI는 2018년 홈페이지 게시물을 통해 "당시 호텔 폐쇄회로(CC)TV가 지금만큼 널리 보급되거나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호텔 로비, 복도, 계단에서 포착된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의 이미지를 신뢰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주요 장소에 CCTV가 없었거나, 있어도 동선을 이어 붙일 만큼 충분하지 않았거나, 화질이 나빠 식별이 어려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호텔 내부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곳이다 보니, 직원이나 손님처럼 보인다면 의심받지 않고 쉽게 섞일 수 있다는 점도 수사가 어려웠던 이유로 거론됐다.

시간은 범인의 편이었다. 워싱턴의 강간죄 공소시효는 15년. 2018년에 접어들면서 2003년 5월 11일과 23일 일어난 워싱턴 호텔 성폭행 사건은 영영 미궁으로 빠져들 참이었다. DNA 정보가 있어 나중에라도 범인이 나타나면 확실히 판별할 수 있지만, 공소시효가 끝나면 어떻게든 죗값을 물을 도리가 없다. 이 사건을 손에 쥔 컬럼비아특별구 검찰청의 제시 K. 리우 검사는 고민 끝에 모험을 결심했다. 범인이 잡히지 않은 2018년 5월 1일, 그는 워싱턴에서 일어난 두 건의 성폭행에 기소장을 냈다. 피고인의 정보는 이렇게 적혔다. "아래와 같은 DNA 정보를 가진 존 도(John Doe, 아무개)". 워싱턴에서 이런 도전을 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아무개를 기소합니다"

제시 K. 리우 컬럼비아특별구 검사가 2018년 5월 제출한 기소장. 피고인이 "아래와 같은 DNA 정보를 가진 존 도(John Doe·미국에서 신원미상의 남성을 일컫는 표현으로, 한국의 '아무개'에 해당)"로 명시돼 있다. 컬럼비아특별구 검찰청 제공

제시 K. 리우 컬럼비아특별구 검사가 2018년 5월 제출한 기소장. 피고인이 "아래와 같은 DNA 정보를 가진 존 도(John Doe·미국에서 신원미상의 남성을 일컫는 표현으로, 한국의 '아무개'에 해당)"로 명시돼 있다. 컬럼비아특별구 검찰청 제공

부담이 따르는 선택이었다. 미국 내 타 지역에서도 DNA만을 활용한 기소 전례가 있었지만, 법리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DNA 기소'가 법률에 명시된 공소시효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만큼, 법의 취지를 훼손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일각에선 DNA 증거 자체는 절대적일지라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황증거 및 알리바이, 기억은 휘발되거나 오염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소시효를 사실상 없애면 수십 년 뒤 법정에서 증언을 토대로 상황을 재구성하거나 피고인이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매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소가 유죄 판결 전까지 피의자를 무죄로 간주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거나, 기소 대상이 지문을 비롯한 개인 특성, 소지품 등으로 무한정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기소보다는 강간에 대한 공소시효 자체를 조건부 폐지하는 등 '법 개정'으로 풀어가야 할 사안이란 주장도 있었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주(州) 등 일부 주는 DNA 증거가 확보되는 등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할 경우 공소시효를 연장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다고 미국 CNN방송은 설명했다.

그럼에도 최소한 DNA 증거는 인정할 수 있는 단서라는 것이 법조계의 주류 의견이었다. DNA는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만큼 식별 가능성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DNA 기소'를 옹호하는 측에선 오히려 이름보다 DNA가 더 개인을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도구인 만큼, 기소장에 이름 대신 적어 넣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CNN은 "판사들은 일반적으로, 추후 신원 확인의 '합리적 확실성'이 보장될 만큼 용의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제공된다면 '존 도'에 대한 영장 청구는 허용된다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기소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대배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결국 8년간 여성들을 유린한 '존 도'에게 자유를 향한 카운트다운은 멈췄다.

"정의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FBI 홈페이지에 게시된 '워싱턴 수도권 호텔 강간범 현상수배' 포스터. FBI 홈페이지 캡처

FBI 홈페이지에 게시된 '워싱턴 수도권 호텔 강간범 현상수배' 포스터. FBI 홈페이지 캡처

기소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아무개, '존 도'다. 범인의 행방은 여태 묘연하다. 범죄도, 목격담도 2006년 이후로 끊겼다. 수감자 중 그의 DNA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WP는 "경찰은 이 남성이 미국을 떠났거나, 사망했거나, 범죄를 멈췄거나, 잘못된 DNA 정보가 기록된 채 수감된 상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심판의 시간은 여전히 '존 도'를 기다린다. FBI 홈페이지엔 제보를 바라는 현상수배 포스터가 걸려 있고, 검찰은 DNA가 확인되는 즉시 그를 법정으로 데려갈 준비가 돼 있다. 그를 기소하기로 결단한 리우 검사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범인은 시간이 흘러도 정의로부터 도망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해자들을 결코 잊지 않습니다."

김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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