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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 '비전 2030'은 왜 소멸했나… '흔적 지우기'에 사라진 장기 비전[창간기획: 초당적 '30년 전략' 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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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당장은 하지 못하더라도 장기 계획은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국가비전 2030’을 만들었다. 단순한 정책 구상이 아니라 성장과 복지를 함께 이루기 위한 장기 국가재정계획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채 말라 죽는 운명을 맞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자서전 '운명이다')
노무현 정부가 2006년 8월 발표한 ‘비전 2030’은 향후 25년을 내다본 최초의 중장기 정책 방향이었다. 과거 난무했던 ‘5개년 계획’보다 훨씬 긴 호흡으로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재정 전략까지 함께 제시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반면 정권 교체로 묻힌 ‘비운의 보고서’라는 평가도 나왔다.
비전 작업은 기획예산처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을 비롯한 국책연구기관 주도로 진행됐다. 약 1년간 민간작업단만 60여 명이 참여해 다섯 차례의 주제별 세미나와 60여 차례의 토론회를 거쳐 마련했다. 이 중에는 보수성향으로 분류되는 학자도 다수 포함됐다. 당시 제시한 △저출산 고령화 △성장잠재력 저하 △양극화 심화 등의 문제 인식은 현재도 유효하다.
하지만 2008년 들어선 이명박 정부는 이를 사실상 백지화했다. 노골적인 전 정부 지우기로 ‘노무현과는 반대로’(Anything but Roh)라는 말이 회자되던 시기였다. 비전 2030 작업에 참여했던 한 대학 교수는 2일 “기획예산처가 주도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등 정권의 이념적 성향을 최대한 배제한 작업이었다”며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 정책을 대부분 부인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이 같은 전임 정권 지우기가 이어지면서, 자연히 정책도 계승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캐비닛 문건’ 논란으로 대표되는 적폐청산 바람으로 박근혜 정부를 지웠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감사원의 ‘표적 감사’ 논란을 감수하면서 탈원전, 소득주도성장 등의 정책을 지우고 있다.
진보정부에서 확장재정을 통해 재분배 정책을 쏟아내다가도,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등 정권 철학의 변화가 주요인으로 꼽힌다.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했던 총 220조 원 규모의 ‘한국판 뉴딜’ 프로젝트는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 전환 과정에서 지워졌다. 지방분권 과제를 주도하는 지방시대위원회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로 출범한 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지역발전위원회, 문재인 정부의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등 정권 성향에 따라 간판을 갈아 끼웠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이명박-박근혜 정권 등 같은 진영에서 정권을 계승한 경우에도 앞선 정권의 중장기 과제를 외면했다. 김대중 정부의 공공부문 개혁 기조는 노무현 정부 들어 바뀌었고, 이명박 정부 말 가동됐던 중장기전략위원회는 2년 가까이 멈춰 있다가 2014년 말에야 겨우 가동된 전례가 있다.
한국판 뉴딜에 관여했던 전직 고위 관료는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기후변화, 인구구조 변화 등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뉴딜의 ‘ㄴ’ 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가 돼 버렸다”며 “일단 전 정권이 하던 것이라고 하면 다 허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하는 행태가 매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전 2030 이후 정권마다 국가중장기계획을 새로 만드는 작업은 반복됐다. 이명박 정부는 중장기전략위원회 주도로 ‘대한민국 중장기 정책과제’를,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 중장기 경제발전전략’을 각각 만들었다. 큰 틀에서 전략은 비슷했다. 모든 장기계획에서 인구구조 변화와 잠재성장률 하락, 양극화 등 공통된 문제 인식을 갖고 있었고 추진과제도 저출산·고령화 대비, 기후변화 대응 등으로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매 정권 ‘리셋’을 거듭하면서 활용도가 떨어졌다. 매번 ‘제로 베이스’에서 작업반 구성부터 시작하다 보니, 실제 중장기 과제가 발표되는 것은 이미 정권이 반환점을 돈 뒤였다. 사실상 ‘다음 정부 과제’로 인식되면서 힘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비전 2030도 노무현 정권 당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컸기 때문이다. 정권을 1년 6개월 남긴, ‘레임덕’ 상태에서 향후 25년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정부는 재정 투입과 관련해서도 ‘2010년까지 추가적인 증세 없이 세출 구조조정 등을 통해 소요재원 충당, 2011년 이후 국민적 논의 필요’라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당시 작업을 진두지휘했던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회고록에 “야당도 찾고 시민단체도 설득해야 했다”며 “정치지형에 대한 고려도 해야 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여야 대치가 치열해진 그 변화를 잘 살폈어야 했다”고 적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전임자의 계획을 무시한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되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이에 중장기 계획이 대통령과 무관하게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해법으로 국회의 역할이 제시된다. 행정부가 마련한 중장기 정책이 국회 논의과정에서 자연스레 공론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법 개정으로 이어져 정권이 바뀌어도 구속력을 갖출 수 있다.
매년 예산안과 함께 공개되는 향후 5년간의 ‘국가재정운용계획’은 대표적인 국회 심의 사례다. 국가재정법을 보면, 정부는 국가재정운용계획 제출 30일 전까지 국회에 수립 방향을 보고하도록 해 국회가 검토할 시간을 부여했다. 정부에서 작성한 재정운용계획은 국회에서 논의되고 이 과정에서 국회예산정책처 등 외부 전문가의 검증을 거친다.
연장선상에서 대통령이 당선 직후 '여야정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쟁점을 중심으로 국정운영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국회 차원에서는 미래 전략을 논의할 별도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도 특위가 채택한 기본계획을 바탕으로 중장기 정책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과거 비전 2030을 주도했고, 현 정권에서도 중장기전략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참여 중인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여야가 함께 중장기계획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미래를 함께 고민할 수 있게 된다”며 “국회의 승인을 거치는 만큼 행정부도 이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구속력도 담보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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