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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길 포기한 범인(凡人)을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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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피해자가 맨몸에 괴상한 단어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 한 장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 혹은 '신원 정보가 유출됐다'는 거짓말로 여성·미성년자를 유인해 결국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박사방 사건의 피해자였다. 아직 검거 전이던 주범들을 취재로 쫓아가던 중 갑작스레 맞닥뜨린 증거물이었지만, 그 순간 자체가 죄스러워 휴대폰 화면을 곧장 바꿔 출입처인 경찰청의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그 성착취물을 피해자가 직접 촬영하고 전송하게 만든 가해자들은 어떤 놈들인가. 박사방 주범 조주빈은 2020년 3월 25일 검찰로 송치되며 취재진에 대고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마치 그 세계의 절대자인 양 자신을 '악마'라고 칭하며 우쭐댄 건데, 조주빈이 텔레그램 프로필 뒤에 철저히 숨어 약자들을 착취한, 한낱 '저급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박사방에 회원으로 가입했던 인물들까지 모조리 법정에 세우고도 수사기관과 언론계가 걱정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범인(凡人)이라는 데 있었다. 복잡해 보이는 범죄지만 마음만 비뚤게 먹으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유형이었다. 공범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수법이 적잖게 공개됐지만, 텔레그램 측은 수사에 협조적이지 않았을뿐더러 이 같은 새 유형의 범죄를 예방할 법적 기반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근심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됐다. 조주빈이 검거된 지 얼마 안 돼 "박사방을 따라 했다"며 불법 촬영물로 여성을 협박해 착취한 일이 생겼고, 2022년엔 박사방과 N번방의 수법을 그대로 베껴 아동·청소년을 협박한 '엘 사건'이 발생했다. 2021년 조주빈이 징역 42년을 확정받으며(이후 강제추행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이 추가됐다) 디지털성범죄를 엄단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공공연히 공표됐지만, 비열한 인간들은 끊이지 않는다.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도 그중 하나다. 조주빈과 양태는 다소 달라도 서울대 사건 주범들 역시 텔레그램을 적극 악용했다. 동문 사진을 음란물에 합성한 뒤 공유한 것도 모자라, 우월감에 취해 피해자들에게 합성물을 전송하며 협박까지 했다. 범행 대상으로 '지인'을 택했던 대범함과는 다르게 주범 중 한 명은 첫 재판 내내 몸을 덜덜 떨며 울먹였다고 한다.
'지인 능욕'이라는, 이름 자체로도 엽기적인 범행이 법 심판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는 반가움 저편에 조주빈 사건 때와 비슷한 걱정이 밀려든다. 개인의 사진과 영상은 널려 있고 합성 기술도 보편화된 현실에서, 너무나도 접근하기 쉬운 범죄여서다. 지금도 텔레그램에 주요 키워드만 넣으면 불법 촬영물과 인적사항을 공유하며 음란 합성물을 만들어 내고 있는 대화방이 우수수 검색된다.
발전을 거듭해 저 멀리 가 있는 디지털 성범죄를 붙잡기 위해선 수사에서 놓치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전 예방에도 마땅한 힘이 실려야 한다. 사후 입법도 중요하지만, 수사 당국과 전문가 집단이 선제적으로 협의해 수사 기술을 수시로 현장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늘 발목을 잡는 해외 기업들의 비협조를 막기 위해, 디지털성범죄 해결을 위한 채널을 만드는 데도 관계부처가 힘을 더해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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