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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망인’

입력
2024.06.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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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박남옥 감독은 한 살배기 딸을 업고 영화 ’미망인‘ 촬영 현장을 누볐다.

박남옥 감독은 한 살배기 딸을 업고 영화 ’미망인‘ 촬영 현장을 누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지난달 31일 ‘한국 영화 100선’을 10년 만에 발표했다. 국내 영화인 240명이 참여한 결과였다. 2014년처럼 1위는 ‘하녀’(1960)였다. ‘살인의 추억’(2003)과 ‘기생충’(2019)이 10년 전 공동 1위였던 ‘오발탄’(1961)과 ‘바보들의 행진’(1975)을 밀어내고 2, 3위에 각각 올랐다. ‘미망인’(1955)이 명단에 처음 포함된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미망인’은 국내 첫 여성 감독인 박남옥(1923~2017)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이다.

□ 1950년대 여성들은 사회진출이 쉽지 않았다. 영화계라고 예외였을까. 박 감독은 한 살배기 딸을 업고 ‘미망인’ 촬영장에 나서야 했다. 매일 스태프 밥을 해 먹여야 할 정도로 제작비 부족에 시달렸다. 그는 ‘미망인’ 후반 작업을 위해 녹음실을 찾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녹음기사에게 “새해부터 여자와 일하면 재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출산보다 더 힘들게 만든” 영화는 극장에 걸린 지 나흘 만에 상영이 중단됐다. ‘미망인’은 박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됐다.

□ ‘미망인’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 신(이민자)을 스크린 중심에 둔다. 남편 친구 도움으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신은 한 남자와 재혼을 한다. 딸을 친정에 맡기고 다시 시작한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는다. 영화는 한 여인의 신산한 삶을 통해 전쟁 직후 한국 사회를 묘사한다. 여성 감독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전후 풍경을 들여다본다. ‘미망인’은 남성 시각으로만 기록됐던 시대를 여성 시각으로 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깊은 작품이다.

□ ‘미망인’은 한국 영화사에서 오래도록 잊혔다.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존재가 뒤늦게 알려져 재평가받게 됐다. ‘한국 영화 100선’ 포함은 때늦은 감이 있다. 20세기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은 희귀종이었으나 적어도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지금 지배종이 돼 가고 있다. 2014년 100선에는 여성 감독 영화 1편만 들어갔으나 올해는 9편이 이름을 올렸다. 5편이 2010년대 이후 만들어진 영화다. 세상은 느리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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