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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테논 신전'은 은유로, '트라야누스 황제 기념주'는 직유로 전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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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술 작품 한 점에는 질문이 끝없이 따라붙습니다. '양정무의 그림 읽어드립니다'는 미술과 역사를 넘나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여러분의 '미술 지식 큐레이터'가 되어 그 질문에 답하는 연재입니다. 자, 함께 그림 한번 읽어볼까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미술이 전쟁을 기록한 결정적 다섯 순간을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전쟁 미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주를 다룬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492년부터 479년까지 페르시아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마라톤 전투부터 한산대첩과 함께 세계 3대 해전으로 불리는 살라미스 해전이 펼쳐쳤다. 영화 '300'의 배경인 테르모필레 전투(BC 480년)도 이때 벌어졌는데, 페르시아 전쟁은 이처럼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는 치열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세계사의 운명을 바꿀 만큼 결정적인 전쟁이었던 것처럼 당시를 묘사한 미술도 강렬하다. 세계 건축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이 전쟁에 대한 추모와 기념의 산물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자리하고 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일찍부터 지어졌지만, 기원전 480년 아테네가 일시적으로 페르시아에 점령당하면서 이 신전은 완전히 파괴됐다.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년부터 438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다시 지은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이 전쟁이 종료된 후에 다시 건설되면서, 페르시아 제국과 벌인 치열한 전쟁에 대한 기억이 곳곳에 새겨졌다. 이 때문에 파르테논 신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승전 기념비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상당한 양의 조각이 들어가 있는데, 크게 페디먼트(pediment), 메토프(metope), 프리즈(frieze) 등 세 부분으로 나뉜다. 건축 구조를 따라 보면, 삼각형 지붕선을 따라 '페디먼트'가 자리하고 그 아래 '메토프'가 자리한다. 안쪽 기둥 위를 따라 연속적인 띠처럼 구성된 공간이 '프리즈'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페디먼트에는 입체 조각이 들어가고 메토프와 프리즈에는 부조 조각이 들어차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들은 아테나 여신의 위대함과 승리를 찬양함으로써 여신의 후예인 그리스인을 스스로 예찬한다. 흥미로운 점은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한 방식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자신들이 믿었던 신화와 역사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4개 면에 있는 총 92개의 메토프가 공유하는 공통 주제는 '인간과 반문명과의 싸움'이다. 켄타우로스와 인간이 싸우는 장면의 경우 적군 페르시아를 암시하는 요소가 좀 더 명확하다.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는 기마 민족인 페르시아인을 암시하고, 수염을 기른 얼굴도 페르시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파르테논 프리즈 조각에는 말을 탄 192명의 기병대가 등장해 마라톤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 병사를 암시한다.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전설 속 인물들도 속속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전쟁을 묘사할 때 신화나 역사적 서술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끌어와서 풀어냈다. 이러한 묘사법을 '그리스적 전쟁 은유법'이라 부를 수 있는데, 간접적 방식을 통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페르시아 전쟁을 직설적으로 다루면 그 전쟁을 겪은 사람만 감동을 느끼겠지만, 은유를 쓰면 전쟁의 보편적인 모습을 대변해 공감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을 통해 본 파르테논 신전의 키워드는 '애국심'이다. 전쟁의 승리와 전쟁으로 죽은 용사에 대한 위령의 의미가 우회적이지만 명확히 담겨 있다. 아름다운 조각들로 장식됐지만 메시지는 굉장히 정치적이고 전투적이다. 후대의 우리 눈에는 미술품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전승 기념물인 셈이다.
서울 어디에서나 남산타워가 보이듯이 아테네에 가면 어디에서나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의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그리스인들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에 승리와 애국의 거대한 기념비를 세웠다. 우리로 치면 현충탑을 어디서나 보일 만큼 거대하게 세웠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후대 사람들이 칭송하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추앙받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부정할 수 없는 존재 이유이다.
그리스가 전쟁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은유를 선택했다면, 로마는 반대로 직설적인 화법을 택했다. 이 같은 로마인의 전쟁 기억법이 가장 잘 나타난 예는 트라야누스 황제(53~117)의 기념주이다. 이 기념주는 높이 35m의 거대한 원형 구조물로, 이집트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킨다. 서기 103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로마 시내의 한복판에 있다.
기둥 내부에는 걸어 올라갈 수 있도록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자세히 보면 채광이 되도록 중간에 사각형 창문도 뚫려 있다. 기둥 맨 꼭대기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청동 조각상이 올라가 있었지만, 16세기에 현재의 베드로 성인 조각상으로 바뀌었다.
자세히 보면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 같은 연속 띠가 기둥을 빙글빙글 감아 올라가는 형태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띠의 높이는 80㎝ 정도로 전체를 펼치면 길이가 대략 200m에 이른다.
여기에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101년부터 벌인 다키아 전쟁 이야기가 하루하루 일기라도 쓴 것처럼 세밀하게 조각돼 있다. 기둥 아랫부분부터 따라 차근차근 올라가면서 전쟁 이야기가 연대기 순서대로 새겨져 있는데, 트라야누스 황제는 부조로 자기만의 ‘난중일기’를 쓴 셈이다.
트라야누스 기념주엔 치열했던 다키아 원정 장면이 담겨 있다. 다키아는 지금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오랜 시간 동안 로마에 저항한 지역이다. 국경선을 맞댄 사이였고, 로마의 군대가 원정을 갔다가 대패한 적도 있었다. 101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 원정에 나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승리했다.
트라야누스 기념주에서 로마군과 다키아인의 전투 장면은 생생히 재현됐다. 다키아인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수염을 기른 채 몽둥이를 들어 돌진하며, 로마 군인들은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채 절도 있게 움직인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과 비교해 보면, 트라야누스 기둥의 전쟁 표현은 훨씬 더 노골적이고 생생하다.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켄타우로스족과 인간이 싸우는 모습은 실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기보다는 연출된 장면으로 보인다. 반면 로마의 조각은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처럼 사실적이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전장의 치열함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지금까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전쟁 기억법을 은유와 직유로 나누어 살펴봤다. 그리스인들처럼 치열한 전쟁을 한발 물러서서 우회적으로 기억할 경우 공감대를 넓힐 수는 있어도 구체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로마인처럼 직설적인 전쟁 기억법을 취할 경우 구체성은 높일 수 있지만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공감대를 얻기는 어렵다. 결국 전쟁을 제대로 추모하고 기념하려면 이 두 방식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야 할 텐데, 실제로 이 두 가지 기억법은 전쟁 미술을 직조해내는 데 있어서 날줄과 씨줄처럼 작용해왔다. 다음 글에선 이 전쟁 기억법의 근대적 변용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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