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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령 ‘칠순’ 우승…‘된장바둑’ 서봉수 “비결이요? ‘락(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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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이요? ‘락(樂)’입니다.”
예상을 빗나갔다. 처절함과 지독함에선 둘째라면 서러워할 소문난 승부사의 태생적인 기질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한가했던 탓이다. 반세기 이상, 적자생존의 반상(盤上) 전투에서만 잔뼈가 굵었던 ‘야전사령관’으로 통했기에 이런 반응은 더 낯설었다. 지난달 24일 열렸던 ‘제11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우승한 서봉수(71) 9단에게 노하우를 묻자 “그냥 즐겼다”라며 돌아온 답변이 그랬다. 지난달 28일 경기 안양시내 자택 인근 공원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즐거움에 기반된 ‘락’을 강조하면서 자신만의 롱런 배경으로 내비쳤다. 대주배가 남녀 중견급 프로 중심의 연령제한기전이지만 바둑계 전설인 이창호(49) 9단 및 유창혁(58) 9단도 참가했던 대회에서 타이틀 획득과 더불어 국내 최고령 우승 기록까지 갈아치웠단 측면에선 서 9단의 이번 대회 우승 의미는 적지 않다. 그는 “이젠 나이도 있고 쟁쟁한 선수들까지 나섰던 기전이어서 어려울 것으로 봤는데, 운이 좋았다”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자’며 다짐했던 ‘락’에서부터 최고령 우승 기록 달성의 요인을 찾아갔다.
“인터뷰까지 할 정도로 큰 대회 우승은 아닌 것 같다”라며 겸손해했지만 국내 바둑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우선, 내구성이 압권이다. 현재까지 왕성한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통산 전적은 1,780승3무1,053패(승률 62.83%). 국내 프로기사 가운데선 최다 대국(2,836국) 1위다. 이 과정에서 품에 안은 국내외 우승트로피는 33개. 이 중엔 3개의 세계 메이저 대회 우승컵이 포함됐다.
데뷔 무대도 강렬했다. 프로입문 2년 만인 1972년 벌어졌던 ‘제4기 명인전’(본보 주관) 결승에서 20세 무명이었던 그가 당대 최고 실력자로 꼽혔던 조남철(2006년 작고) 9단에게 깜짝 승리, 국내 최고 권위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 일본 유학파들이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그 시절, 서 9단의 토종 독학 ‘된장바둑’으로 촉발된 이 반상 반란은 당시 본보 1면 톱기사에 배치됐다. 이 때 세워진 입단 이후 종합기전 최단기간(1년8개월) 타이틀 획득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그는 이후 4년 마다 개최되면서 ‘바둑 올림픽’으로 불렸던 ‘제2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1993년)에서 우승, 글로벌 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그는 이어 1997년엔 한·중·일 국가대항전으로 개최된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현 농심신라면배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과 일본 대표로 출전했던 9명의 선수들을 모두 격침, K바둑의 위상도 격상시켰다. 서 9단의 세계대회 최다 9연승 기록은 27년째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치열함의 대명사였던 그가 ‘락’ 전도사로 거듭난 이유는 뭘까. ‘혹시 요즘 불교계를 강타한 뉴진스님의 ‘극락도 락(樂)이다’에서 영감이라도 얻었냐’는 질문엔 손사래부터 쳤다. “뉴진스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체질상 누구를 따라 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락’을 강조했다는 건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락’에 심취하게 된 배경으로 이어졌다. “학창시절부터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어요. 대신 당구나 포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나중엔 우연한 기회에 ‘왈츠’까지 배웠어요. 통기타도 쳤어요. 살면서 ‘즐거움’이 가장 중요한 가치란 사실을 어느 날 문득 예전 생각에 잠기면서 알게 됐습니다.” 바둑 입문 동기도 맥락은 같았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해서 동네 기원에 갔거든요. 이 때 아버지 어깨 너머로 보게 된 바둑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바둑에 대한 즐거운 호기심이 그를 반상으로 안내한 셈이었다.
껄끄러웠을 법했던 동갑내기 라이벌인 ‘바둑황제’ 조훈현 9단에 대한 그의 생각도 쿨했다. “조 9단이 1인자였죠. 천재였으니까요. 저는 2인자에 불과했어요. 실전에서도 제가 조 9단에게 많이 졌습니다.” 서 9단은 조 9단과 함께 1970~80년대 국내 바둑계를 호령했다. 조 9단은 이런 서 9단과 관련, “승부에 대한 집착과 포기할 줄 모르는 근성을 배웠다”며 호평했다.
하지만 국내 바둑계 현안에 대한 물음에선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진서 9단이 현재 세계 1위이지만 위태로워 보입니다. 경쟁국인 중국의 공세를 혼자서 막아내기란 쉽지 않거든요.” 신 9단을 뒷받침할만한 후배들의 분발이 절실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최근 국내 바둑계의 ‘뜨거운 감자’인 정부의 바둑 지원 예산 축소에 대해선 아쉽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K바둑이 지금 세계 1위잖아요. 바둑판에서 세계 1위에 올라가는 것도 힘들지만 지켜내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 판국에 정책적인 지원은 미미한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최근 바둑에 대한 정부의 예산 삭감 한파와 여파를 염두에 둔 걱정으로 들렸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선 후배들에게 마지막까지 부끄럽지 않은 55년차 선배의 모습은 보일 것이라고 다짐했다. 최근 1년 가까이 대상포진으로 고생했다고 털어놓았지만 현역 연장에 대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지금도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인터넷으로 바둑 연구에 매달리면서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다. 당장, 11일부터 세계 시니어 기전으로 예정된 ‘제5회 월드바둑챔피언십’ 국제대회에도 나서야 한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포기는 몰랐다. “젓가락을 집어들 힘만 있으면 대회에 나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10년은 더 대국장에서 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직까지 현역에서 은퇴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의 반상 행마는 이미 ‘월드바둑챔피언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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