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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SK로 간 '노태우 300억', 일찍 드러났다면 국가 추심소송 당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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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3,808억 원. 사상 최고의 재산분할액 선고가 나온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항소심 최대 쟁점은 '노태우 비자금 300억 원'의 실체였다. 재판부는 노 관장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돈이 최종현 선대회장을 통해 SK그룹(당시 선경)으로 유입된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30년 동안 존재 자체가 꽁꽁 숨겨져 있던 이 돈을 두고, 재판부는 "일찍 알려졌더라면 국가의 (추징금) 추심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재판부는 300억 원은 '당시 기준'으로 보아 불법적인 재산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달았다.
31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시철)는 노 전 대통령(2021년 별세)이 최 회장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1998년 별세)에게 1991년 300억 원 상당의 금전적 지원을 했단 사실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 부인인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 오던 약속어음 6장(이 중 2장은 2012년 SK그룹에 교부)을 근거로 이런 판단을 했는데,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돈을 넘겨줄 당시 SK 측으로부터 약속어음을 받았다고 본 것이다.
이 약속어음의 존재는 이번 이혼 재판에서 처음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과 김 여사는 대통령 재임 기간을 전후로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최소 수백억 원(김옥숙 메모 기준 666억 원)의 돈을 보관하도록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넨 돈의 존재는 노 전 대통령 수사·재판이나 추징금 납부 과정 등에서 대부분 확인됐지만, 김 여사는 딸(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에 이를 법정 증거로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양측은 재판 과정에서 '어음'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 노 관장 측은 '아버지 돈이 넘어간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비자금은 선경그룹이 1992년 태평양증권(현 SK증권)을 인수하고,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등 SK그룹 확장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최 회장 측은 돈 받은 증거가 아니라 퇴임 후 대통령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위한 증표'라고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활동비 등을 요구하는 경우 제공하기로 약속했다는 의미"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김 여사의 메모(1998년 4월과 1999년 2월 작성) △이미 수천억 원 비자금을 조성했던 노 전 대통령이 SK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상황 △노 전 대통령과 최 전 회장 간에 오갔던 대화 등을 근거로 약속어음의 존재를 인정했다. 김 여사 메모에는 노재우(노태우 동생)씨에게 120억 원, 신명수(사돈) 신동방그룹 회장에게 230억 원 등을 제공한 사실이 적혀 있는데, 이 액수는 수사와 재판에서 인정된 것들이라 메모의 신빙성이 높아졌다. 김 여사는 해당 메모에 '선경 300억 원'이라 적었고, 약속어음은 '선경 300'이라 적은 봉투에 보관해 왔다.
1988년 말 최 전 회장이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30억 원을 주려고 했다가, 노 전 대통령이 "사돈끼리 왜 이러시냐"며 거절한 사건(노 전 대통령 형사사건 조서에 적시) 역시 근거가 됐다. 그런 상황이 있었음에도 1992년 갑자기 노 전 대통령에게 300억 원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당시는 노 전 대통령이 이미 기업가, 친인척, 금융기관 등에 비자금을 맡겼던 상황이라 퇴임 후 사돈에게까지 손을 벌려 따로 활동비를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참작했다.
재판부는 "노 관장 측이 갑자기 약속어음의 존재를 들고 나와 신빙성이 없다"는 최 회장 측 주장도 물리쳤다. 어음이 공개될 시 도덕적 비난, 기업 활동의 어려움, 추징의 위험성, 소송 전까지 유지되던 두 사람의 혼인관계, 대외적으로 약속어음이 공개될 경우 혼인관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문제라는 점 등을 고려해 본다면 공개를 늦춘 것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비자금 300억 원의 존재 자체는 향후에도 논란의 불씨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돈의 성격이나 출처 등을 명확히 밝히진 않았다. 다만 "노 전 대통령 측이 최 전 회장으로부터 교부받은 약속어음 및 보관 경위가 대외적으로 공개됐다면, 대한민국이 최 전 회장을 상대로도 추심 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며 여지를 남겼다.
동시에 이 돈이 불법원인급여(불법한 원인에 의해 행해진 급부)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최 회장 측은 "노 전 대통령이 불법 비자금 300억을 맡겼다는 주장을 인정해 재산 기여도를 인정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반사회 범죄로 얻은 수익을 노 관장이 찾아가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라고 주장해왔는데,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설령 소송 전 돈의 존재가 밝혀졌더라도 1991년 최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은 것 자체를 불법원인급여로 보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200억 원을 숨기려고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에게 빌려준 것을 '사회질서에 반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를 함께 근거로 들었다.
최 회장은 과거 노 관장을 향한 편지에 "재산도 쓸데없이 많아봐야 문제만 더 생기고, 욕심만 생겨 '걱정덩어리'만 된다"고 적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경유착으로 형성된 비자금이 국내 굴지 대기업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 '세기의 이혼' 사건은 이제 대법원의 판단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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