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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집념 담은 명작소설이지만 도서관 '수산업 코너'에 꽂혀 있던 '모비 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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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1851년에 출간된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 딕'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함께 영어로 쓰인 3대 비극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 작가 작품 가운데 최고로 꼽히기도 한다. 유명 작가들의 부러움과 칭찬도 대단하다. 윌리엄 포크너는 다른 작가의 작품 가운데 ‘내 작품’이었으면 하는 유일한 작품이라 했고, 경쟁심이 강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뛰어넘고 싶은 작가로 허먼 멜빌을 꼽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대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 고래잡이가 소재라는 이유로 도서관에서 수산업 코너의 고래잡이 책으로 분류했을 정도다. 판매량도 너무 적었다. 소설이 발표되고 40년이 지나 작가가 죽을 때까지 3,751부밖에 판매되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빛을 보았고 ‘찬양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국어 번역은 30년 전쯤에는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읽을 만한 현대한국어 번역본은 2011년에야 출간된다. 기다리던 독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판매량이 꽤 많았고 꾸준했다고 한다. 이후 역자는 ‘잘못된 해석과 어설픈 번역’을 수정하여 2024년에 전면개역판을 내놓았다. 이런 상황을 보면 소설의 내용이 지금도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170년 전에 출간된 미래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번역자는 번역이 대단히 어려웠다고 한다. 19세기에 쓰인 영어라는 이유도 컸겠지만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규모의 고래잡이와 관련된 내용이라 적당한 번역어를 찾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텍스트가 묘사하는 장면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그 점은 독자도 마찬가지다. 상상할 수 있어야 텍스트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글의 표면적인 의미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누가 고래잡이 배를 타 본 적이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 문제는 영화와 그래픽 노블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2015년에 제작된 영화 ‘하트 오브 더 씨(In the Heart of the Sea)’가 그 열쇠이다. 이 작품은 당시 고래잡이 경험자의 노트와 1820년에 출간된 항해사의 책을 참조하여 2000년에 쓰인 논픽션을 영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허먼 멜빌이 경험담을 듣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는 설정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허먼 멜빌의 천재성은 ‘가본 적도 없는 곳과 해본 적이 없는 경험’이라는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직접 경험한 것처럼 대단히 정확하고 사실적인 드라마로 재구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작품이지만 고래에 대한 해부학적인 지식이나 생태에 대한 내용도 매우 정확해 보인다.
여기까지는 텍스트의 표면적인 이해를 위한 내용이다. 이 작품의 깊은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사람들과 사물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캐 보아야 한다.
'모비 딕'이라는 제목부터 그렇다. 허먼 멜빌은 당시에 구할 수 있는 고래와 관련된 학술서적이나 논문만이 아니라 온갖 경험담까지 수집해서 읽었다. 그 가운데에는 예레미야 N. 레이놀즈가 쓴 ‘모카 딕(Mocha Dick), 태평양의 흰고래 이야기’(1838)가 있었을 것이고, 그 책에서 기본 모티프를 얻었을 것이다. 모카 딕은 30년 동안 고래잡이 배를 공포에 몰아넣곤 했던 칠레 남부 모카섬 근처에 살던 거대한 흰고래다.
고래의 이름에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딕(dick)이 붙게 된 것은 고래잡이들이 주로 잡았던 향유고래의 이름이 원래는 정액고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고래의 머리에는 정액처럼 미끈미끈한 향유가 담겨 있다. 이 기름을 한국어로 경뇌유(고래 머리 기름)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고래정액(spermaceti)’이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하면 94장의 '손으로 쥐어짜기’ 문장을 읽으며 외설적인 의미를 느끼기 어렵다.
이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도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에 의미심장하다. 유일한 생존자인 소설의 서술자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라고 하자." 구약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들이지만 하녀 하갈에게서 태어난 인물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아이를 낳게 되자 집에서 쫓겨나 황무지를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고비를 맞지만 하나님의 구원으로 살아남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설 ‘모비딕’의 서술자 캐릭터로 매우 적당해 보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래잡이 배인 피쿼드호에 승선했던 다른 선원들은 모두 흰고래의 공격을 받아 죽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살아남아서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고래잡이 배 이름인 ‘피쿼드’는 17세기 신대륙 개척자 유럽인들이 전쟁을 통해 멸종시킨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다.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이 소설의 결말이 비극적이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부족의 후손이 살아남아 오늘날에는 미국 코네티컷주 카지노의 소유주가 된 것이다. 피쿼드호는 사라졌지만 생존자 덕분에 이 소설이 쓰인 것처럼.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허브(Ahab)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합(Ahab)왕이다. 열왕기의 주요 인물인 아합은 우상숭배에 집착했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결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소설 속의 에이허브 역시 모비 딕에 대한 복수에 집착하다가 부하 선원들과 함께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이런 비유를 알고 보면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제왕적 위엄을 띤 강한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와 같은 묘사가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에이허브가 히틀러로 읽혔고, 2010년쯤에는 이윤에 눈이 멀어 깊은 해저를 굴착하는 정유회사로, 2011년에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중동의 독재자로 읽히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인종들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원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이 현대적인 감각을 배신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서로 도우며 함께하는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백인이 다른 인종을 차별하지도 않고, 흑인과 인디언, 심지어 식인종 출신이라고 해도 열등감을 드러내는 언행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고래잡이에 나선 한 고래잡이 배가 거대한 흰 향유고래를 만나 파괴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만으로 어떻게 8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이 되겠는가. 흥미진진한 스토리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수많은 곁가지에 질식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문명과 자연의 대결로 읽을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갈등의 허무를 치유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백인이 멸종시킨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딴 배가 흰고래를 쫓는다면 백인에 대한 복수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한다. 그렇다면 미국을 차지한 백인들이 저지른 인디언 학살의 역사를 잊지 말자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래 사냥은 고래를 멸종으로 몰고 가고, 그 멸종은 결국 ‘고래 산업’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터전을 파괴하리라는 예언이 될 수 있다. 그 끝에는 인간의 멸종이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이야기가 된다.
찬찬히 읽어보면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인도의 성전 베다에 나오는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시바신을 떠올리게 된다. 소설은 수많은 암시와 세상 사물에 대한 통찰력으로 의미가 켜켜이 쌓인 오래된 상징을 불러내고 정치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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