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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와우치를 보고 싶다

입력
2024.05.29 17:00
수정
2024.05.29 17:0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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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가 2019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역주하는 모습. 연합뉴스

일본의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가 2019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역주하는 모습. 연합뉴스


요즘 입시철이라 내일도 출근해야 합니다.

일본의 마라토너 가와우치 유키(37). 그는 2011년 도쿄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8분대 기록으로 3위를 한 뒤 취재진에 이렇게 말했다. 세계적 선수들이 나서는 국제대회에서 풀코스(42.195㎞)를 내달린 마라토너가 회복 기간 없이 다음 날 출근을 한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사실 그의 본업은 따로 있었다. 당시 사이타마현 소속으로 한 고등학교 행정실에서 일했다. 이름만 걸어놓고 마라톤 훈련에 매진한 게 아니라 주 40시간 넘게 일하는 진짜 공무원이었다.

도쿄 마라톤 3위는 괴짜 마라토너의 요행수가 아니었다. 가와우치는 학교 일을 마친 뒤 개인 훈련에 매진해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7년 런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톱10에 진입했다. 그리고 2019년, 그의 인생에 화양연화가 찾아온다. 모든 마라토너에게 꿈의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이다. 가와우치는 그제야 사직서를 내고 프로 선수로 전업했지만 팬들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공무원 마라토너'로 각인돼 있다.

새삼스럽게 일본 마라토너 이야기를 꺼낸 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파리 올림픽 때문이다. 우리 체육계는 본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 이미 맥이 빠졌다. 축구, 농구, 배구 등 국내 프로 리그가 있는 구기 종목들이 모두 본선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달밭'으로 여겼던 레슬링, 유도 등에서도 본선행 티켓을 따낸 선수가 이전보다 확연히 적다.

반면 일본은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다. 남녀 축구와 농구, 남자 배구가 올림픽 본선행에 성공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거둔 종합 3위를 지켜내는 건 쉽지 않겠지만 제법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눈치다. '엘리트 스포츠는 한국, 생활 스포츠는 일본'이라는 공식은 이미 깨졌다.

일본 엘리트 스포츠가 지난 10년 새 대도약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두꺼운 선수층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 아이들은 중고교 때 부카츠(部活·부활동의 줄임말)에서 1개 이상의 스포츠 종목을 배운다. 우리처럼 초교 3, 4학년 때 운동부에 발 들이면 직업 선수가 되는 길만 바라보며 인생을 온전히 걸어야 하는 문화가 아니다. 덕분에 부담 없이 운동을 시작한다. 일본의 중학생 중 3분의 2, 고등학생 중 절반이 운동부 활동을 한다. 한일 엘리트 스포츠의 경쟁력은 여기서부터 벌어진다.

졸업 이후 프로 선수가 못 되더라도 가와우치처럼 다른 직업을 가지고 운동을 병행하다 보면 뒤늦게 꽃피울 수도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소프트볼 금메달리스트인 사토 리에는 당시 부동산 업체가 운영하는 사회인 팀 소속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오전에는 인사팀에서 일하며 신입 사원 채용 업무 등을 담당했고 오후에 운동을 했다"고 회상했다.

약 40년간 유지돼 온 한국식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유효기간을 다했다는 징후는 파리 올림픽 이전부터 곳곳에서 포착돼왔다. 합계출산율 0.72명인 나라에서 일부 아이들을 조기 선발해 특공대 육성하듯 선수로 키워내는 건 성과도, 의미도 없는 일이 돼가고 있다. 다른 진로도 모색하면서 운동선수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다. 한국의 가와우치를 보고 싶다.

유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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