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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 폭거 물리쳐 줘 고마워요"... 왜곡되는 중국의 6·25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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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간 한반도와 교류와 갈등을 거듭해 온 중국. 우리와 비슷한가 싶다가도 여전히 다른 중국. 좋든 싫든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중국. '칸칸(看看)'은 '본다'라는 뜻의 중국어입니다. 베이징 특파원이 쓰는 '칸칸 차이나'가 중국의 면면을 3주에 한 번씩 보여 드립니다.
"미제의 폭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난달 6일 중국 산시성 성도 시안시에 위치한 산시역사박물관. 주나라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중국 고대 유물 수십만여 점이 전시된 이곳에 난데없이 아기자기한 필체의 한글이 적힌 전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6·25전쟁 당시 북한 어린이들이 중국공산당 인민지원군(이하 중공군) 병사들에게 보냈던 '위문편지'들이었다. 오랜 세월에 흐릿해졌지만 몇몇 구절은 읽어낼 수 있었다.
"지원군 형님, 멀고 먼 중국에서 우리 강토에 조국과 인민을 위해 여기까지 오신 덕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 싸우는 아저씨들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야만적인 폭격으로 모든 건물을 불태워버린 미국 제국주의자 놈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중략) 자유롭게 소년단 생활과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글씨체는 달랐지만 중공군 개입에 투영된 논리는 뚜렷했다. 조선을 침공한 건 미국이고, 중공군의 '참전'이 조선을 구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선을 도와 미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쟁'이란 뜻이다. 6·25전쟁 참전일(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삼아 왔고, 최근 들어선 북한이 '전승절'(7월 27일)이라고 부르는 정전협정 체결일도 항미원조 전쟁 승리 기념일로 자축한다. 중국 3대 역사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산시역사박물관이 지난해 말부터 별도 전시관을 내 '항미원조 전쟁 유물전'을 연 것도 항미원조 승리 70주년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전시관에는 참전 당시 중공군 각 연대의 깃발과 "중공군의 참전을 환영한다"고 쓰인 수십 점의 배너, 중공군 활약상을 담은 소식지 수백 권이 꼼꼼하게 진열돼 있었다. 전장에 남은 탄피로 만든 공예품과 작전 지시용 나팔도 눈에 띄었다.
전시관 끝에 걸린 맺음말(宗言)에는 "이 전쟁의 승리는 (중국의) 전 인민이 일심동체로 이룩한 위대한 승리이자 화려한 승전가"라고 쓰여 있었다. 또한 "항미원조 전쟁의 불길 세례를 겪은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새로운 여정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전진 중"이라고 했다. 8,000여 점의 유물이 마련된 전시관을 둘러보는 동안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한국군과 북한 인민군의 존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나 설명은 찾기 어려웠다. 북한의 남침도, 남침 이전 소련 스탈린 정권의 '남침 윤허'가 있었다는 역사도 없었다. '미국에 맞서 중국이 승리를 거둔 전쟁'이라는 일방적 서사만이 전시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최근 중국의 항미원조 전쟁 서술에선 갈수록 한국군의 존재가 흐릿해지고 있다. 중국 영화 사상 최대 흥행작으로 기록된 2021년 개봉작 '장진호'가 대표적이다. 6·25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지만, 러닝타임 3시간 동안 한국군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부터 같은 해 9월 미군 3만 명과 중국 지원군 12만 명이 맞붙은 장진호 전투까지를 배경으로 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전쟁 당사자인 한국군이 '적'으로도, '전쟁 피해자'로도 묘사되지 않는 점은 애당초 이 영화가 한국의 존재를 철저히 배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북한)의 요청으로 출병해 미국을 제압한 전쟁'이라는 논리의 완결성을 기하자면, 또 다른 조선인 한국의 존재는 아예 없는 편이 낫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중 간 대결을 부각하려다 보니, 북한 인민군 역시 열세에 처한 힘없는 동료 정도로만 묘사된다. 한민족 간 전쟁을 중국의 대미 승리 전쟁으로 둔갑시킨 이 영화는 1억2,000만 명의 관객이 봤다.
물론 실제 역사는 다르다. 한국군이 처음으로 중공군을 격파한 파로호 전투, 6·25전쟁의 주요 장면으로 항상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 휴전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금성지구 전투 등 한국군과 중공군 간 충돌은 중공군 참전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중공군이 서부전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국군 사단을 가장 먼저 섬멸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의 1차적 원인인 북측의 '남침' 역사도 중국에선 철저히 지워졌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뒀던 2021년 8월 10일 자 '위대한 항미원조'라는 사설에서 "평화와 안녕을 바랐던 중국의 바람은 거친 도전을 받았고,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중국 인민에게 전쟁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며 불가피하게 중국이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침략자'라는 프레임을 구축하려는 중국에 북한 남침은 불편한 역사인 셈이다.
중국이 처음부터 6·25전쟁을 미중 대결전으로 부각시킨 것은 아니다.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내부 혼란을 거듭했던 1950~60년대 항미원조 전쟁은 뾰족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니지 않았다. 미중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된 1970년대 들어선 항미원조 전쟁을 띄울 이유가 더욱 없었고,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 시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6·25전쟁 전문가인 자오마 세인트루이스워싱턴대 교수는 미국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서 "1970년대 데탕트 시기부터 중국이 주요 서방과 본격적으로 수교하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누그러졌던 항미원조 개념은 2000년대 들어 '미국은 숙적'이라는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왜곡된 채로 재등장했다"고 짚었다. '도광양회(韜光養晦·실력을 기르며 때를 기다린다)' 전략에서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랑외교(戰狼外交)'의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항미원조 전쟁을 대미 적대감 고취를 위한 수단으로 앞세웠다는 뜻이다.
이는 '항미원조 전쟁 기념식의 기념사'에서 잘 드러난다. 50주년(2000년) 기념식에 참석한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은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의 위대한 승리였다"며 비교적 담담한 평가를 냈다. 60주년(2010년) 기념식에는 후진타오 당시 주석이 참석했으나 대외 메시지는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 현 주석이 했다. 기념식 중 열린 좌담회에서 시 당시 부주석은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평화를 지키고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며 중조(중국과 북한)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언했다. 북한의 남침 대신 미국의 침략에 따른 전쟁이라는 해석을 공식화한 것이다.
10년 뒤인 2020년 국가주석으로 다시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시 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다"며 미국의 침략을 중국이 막았다는 논리를 더욱 구체화했다. 또한 "전쟁 중 중조(중국과 북한) 인민의 군대는 미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렸고,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100년의 치욕을 지우고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중국의) 오명도 벗어던졌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을 동방과 서방 간 우위가 뒤바뀌게 된 굴욕의 역사로 보는 시선이 강한데, 항미원조 전쟁이 중국이 재기하는 주요 분기점이 됐다는 얘기다. 션즈화 화동사범대 역사학과 교수는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한국전쟁은 중국이 더 강한 적(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중국인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짚었다.
항미원조 전쟁의 의미는 근래 들어 '대만 통일' 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인민일보는 최근 항미원조 전쟁의 정당성을 설명한 기사에서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대만해협에 병력을 파견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은 당시 6·25전쟁 혼란을 틈타 중국이 대만 수복에 나서는 것을 저지할 심산으로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이동시켰다. 항미원조 전쟁을 다룬 기관지와 관변 학자들 역시 전쟁 참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미국의 7함대 파견을 빠짐 없이 다루고 있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대만 통일을 훼방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에 맞서 싸웠고, 앞으로도 싸워야 한다는 논리다.
탕원팡 홍콩 과학기술대 교수는 SCMP에 "중국의 항미원조 띄우기는 미국이 점차 대만해협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대만 통일을 위해서라면 7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메시지가 항미원조 전쟁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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