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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격침시킨 ‘알파고’ 그후…바둑계 점령한 AI, 명암과 후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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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시간이 왔다.”
8년 전, 충격적인 경험부터 떠올랐다. 앞서, 반상(盤上)에서 검증된 인공지능(AI)의 강렬함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겨졌던 터였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언젠가 AI가 모든 것을 변화시킬 것이란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며 차세대 AI 음성 서비스를 소개한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의 발언으로 재소환된 기억에서다. 지난 2016년, ‘알파고 쇼크’를 가져왔던 허사비스 CEO의 진단이었기에 임팩트는 더했다. 허사비스 CEO에 의해 바둑 AI 프로그램으로 설계된 알파고는 당시 인간계 간판스타였던 이세돌 9단과 맞대결에서 예상 밖의 압승(4승1패)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왔다.
그로부터 8년, “AI가 세상을 바꿀 것”이란 허사비스 CEO의 선견지명은 현실 속에서 속속 증명되고 있는 가운데 사실상 AI 영향권하에 편입된 국내 바둑계 명암도 재조명받고 있다.
AI의 반상 진입은 바둑계엔 상당한 호재로 다가왔다. 당장, 최첨단 AI가 4000년 역사의 바둑과 벌였던 진검승부 자체만으로도 대중들의 시선을 흡수했다. 인지도 상승과 저변 확대는 덤으로 따라왔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여성 애기가들과 교육적인 측면을 고려한 어린 학생들의 바둑 입문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고 말했다. 바둑이 올해 정부에서 저출생 위기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한 ‘늘봄학교 프로그램’(★[단독]”정부 ‘늘봄학교’ 기본 프로그램에 바둑 포함된다” 본보 2월7일자 23면)에 포함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AI 프로그램 덕분에 상향 평준화된 기력으로 프로 대국의 치열함과 박진감이 배가된 부분도 긍정적이다. 그 동안 1대1 맞대결인 프로 대국에서 하수가 고수를 만날 경우, 심리적으로 위축되면서 제 기량을 펼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지만 인간계 보다 높은 수준의 AI 프로그램 등장에 힘입어 이런 기류도 180도 달라진 것. 현직 바둑 국가대표 코칭스태프 관계자는 “요즘 프로 대국에서 고수들만의 프리미엄이 사라진 건 오래됐다”며 “여기엔 AI 프로그램의 영향이 컸다”고 짚었다.
프로 기사들의 현역 연장 분위기도 AI가 주도하고 있다. 30대 중반이면 눈에 띄었던 경기력 저하를 AI 프로그램으로 만회하고 있어서다. 한 중견 프로바둑 기사는 “집에서 자유롭게 AI 프로그램으로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니, 여러 명이 모여서 바둑 공부를 할 때 보단 효율성이 훨씬 좋아지고 성적도 나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AI 프로그램으로 바둑계에 드리워진 어두운 단면도 적지 않다. 시급한 현안은 역시 일자리 문제다. 그 동안 프로 기사들의 현역 은퇴 이후엔 주로 바둑도장에서 후진 양성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AI 프로그램이 출몰하면서 여의치 않아졌다. 전직 바둑 국가대표 코칭스태프 관계자는 “요즘엔 프로바둑 기사들조차도 대부분 집에서 AI 프로그램으로 바둑 공부를 하고 있다”며 “바둑에 관심을 가진 어린 학생들이나 프로 입단을 목표로 한 연구생들도 도장 보단 AI 프로그램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귀띔했다.
승부에만 집착하면서 빚어졌던 ‘치팅’ 논란도 웃지 못할 AI 프로그램의 부작용이다. 치팅이란 인터넷 바둑이나 체스, 장기 등에서 AI를 악용한 부정행위이다. 실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유행 기간 동안, 한국과 중국에서 진행된 인터넷 공식 프로 대국 도중 치팅 사례가 적발됐고 해당 선수들에겐 1년 전후의 자격 정지 처분까지 주어졌다.
AI 프로그램에만 의존하면서 반상에서 연출 가능한 창의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부문도 아쉬운 대목이다. 무한대 경우의 수로 최고 두뇌 스포츠를 자임해온 바둑 위상 악화도 불거질 것이란 지적에 힘이 실린 배경이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스스로 연구해서 최적의 수순을 찾아가기 보단 AI 프로그램에 먼저 물어보고 쉬운 길로만 가려고 하는 프로기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이런 현상은 결국 바둑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창성을 떨어뜨리면서 인기도 하락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알파고’는 AI 프로그램의 춘추전국시대도 열었다. 인간의 고유한 두뇌 영역으로, 비인간계에겐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고난도 바둑이 알파고에 의해 뚫리면서 숱한 AI 프로그램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중국 ‘절예’와 ‘골락시’ 등을 포함해 미국 ‘카타고’, ‘미니고’, ‘엘프고’, 벨기에 ‘릴라제로’, 일본 ‘딥젠고’, 한국 ‘돌바람’, ‘한돌’, ‘바둑이’ 버전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중국과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AI바둑대회엔 새로운 유형의 프로그램들이 출전, 자웅을 겨루고 있다.
AI 프로그램 중에선 중국의 기세가 단연 압도적이다. 지난 2022년 강원도에서 열렸던 세계AI바둑대회의 8강 대진표도 모두 중국 AI팀으로 짜여졌다. 이 대회엔 한국과 중국, 일본, 호주, 프랑스 등에서 19개팀이 참가했지만 만리장성의 높은 벽만 실감해야 했다.
이 가운데선 ‘절예’가 가장 막강하다. 앞선 2010년대 중후반, 열렸던 세계AI바둑대회에서 우승으로 경쟁력을 입증한 ‘절예’는 현재 중국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만 지원되고 있다. 이어선 ‘골락시’가 뒤를 따르고 있다. 유료인 골락시의 경우 최하 18급에서 최상 30단계로 구분해 제공된다. ‘골락시’와 유사한 수준의 기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 ‘카타고(무료)’가 3인자인데, 국내 프로 기사들의 대부분이 활용하고 있다. 한 중견 프로바둑 기사는 “세계 바둑의 중심인 한국의 AI 프로그램이 국제대회에선 뒤처지고 있다는 게 아쉽다”라며 “국내 바둑계 차원에서 토종 AI 프로그램 육성도 필요해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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