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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덕에 흥한 한국, 교육 탓에 망할 판"… 입시에 갇혀 대전환기 무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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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 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 6월 수능 모의평가가 끝난 공립 일반고 3학년 교실. 학생 25명 중 수업 중인 교사에게 귀를 기울이는 학생은 9명뿐이다. 다른 16명 중 절반은 교실에 없다. 오전 수업만 받고 조퇴했거나 체험학습 계획서를 제출하고 등교하지 않은 경우로, 대부분 학원이나 '인강(인터넷 강의)'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준비를 하고 있다. 교실에 있는 남은 8명 가운데 서너 명은 대놓고 잠을 자거나 잡담으로 수업을 방해한다. 조용히 깨어있는 나머지는 유튜브로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 관련 영상을 보는 등 딴짓을 하거나 그저 멍하니 앉아있다.
현장 교사들 설명과 수업 파행 관련 실태조사 결과를 종합해 가상으로 그려본 고3 교실 풍경이다. 한쪽엔 수능 준비에 '올인'하려고 학교 수업 대신 사교육을 택한 학생들이 있다. 한성준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학교에 나와야 잠을 자거나 딴짓이라도 할 텐데 요즘 아이들은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며 "학교가 입시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한쪽엔 유명 대학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열심히 해봤자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을 줄인 말로 효율을 뜻함)가 떨어진다며 학교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이 있다. 29년 경력의 조만기 경기 다산고 교사는 "성적 중하위권을 중심으로 대학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줄어들고 있다"며 "(학비로) 최소 1억 원을 들여 대학 4년을 다니고서 중소기업에 들어가는 게 맞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좋은교사운동이 2022년 일반고 고3 담당 교사 261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교사들은 학급당 25명 기준 수업 미참여 학생 수를 16~20명(36%), 11~15명(21%), 21~25명(17%), 6~10명(16%), 0~5명(10%) 순으로 많이 꼽았다. 평균을 내면 한 반 25명 중 16명이 수업을 듣지 않거나 아예 교실에 없는 셈이다.
수업 미참여 행태(복수응답)로는 수업과 무관한 학습하기(57%), 가정학습 등 미등교(48%), 수업 중 잠자기(33%), 일부 교시만 출석 후 조퇴하기(28%)가 많았다. 이런 상황이 만연한 근본 원인으로 교사 절대다수는 '학교 수업을 듣지 않아도 입시에 별 어려움이 없는 현행 입시제도'(93.5%)를 지목했다.
'잠든 교실'에 관한 교육부의 정책 연구도 있었다. 지난해 고교 1, 2학년생 4,3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토대인데, 이 조사에서 '우리 반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자는 편이다'라는 문항에 27.3%가 동의했다.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교실 붕괴' 풍경은 우리 교육의 문제적 상황, 특히 교육이 입시에 매몰돼 본래 목적과 기능을 잃은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학생에게 학교가 진학하려면 마지못해 다녀야 할 곳, 친구가 한정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경쟁자로 여겨지는 현실에서는 전인교육도, 자아실현도, 사회혁신 및 통합도 발붙일 곳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저출생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구조 급변에 직면했다. 입시 경쟁에 붙들려 옴짝달싹 못한 채로 대전환기에 직면한, 그야말로 한국 교육의 '이중위기'다. "교육 덕에 흥했던 우리나라가 이제 교육 탓에 망하게 생겼다"(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오는 난국이다.
역대 정부는 대입 제도를 교육 문제의 핵심으로 보고 끊임없이 바꿔왔지만, 공교육이 총체적인 문제에 봉착하는 걸 막지 못했다. 단순 암기에만 치중하는 대입 학력고사의 폐단을 막기 위해 1993년 수능이 도입됐고, 1995년 김영삼 정부의 5·31교육개혁으로 학교생활기록부 제도가 도입됐다. 이렇게 '수능 중심 정시'와 '학생부 기반 수시'라는 대입의 큰 틀이 설정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과도한 입시 경쟁을 줄이고 △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며 △창의적이고 경쟁력 있는 인재를 길러낸다는 본래 목표는 여전히 요원하다.
수능은 '공정한 성적 변별 도구'를 바라는 사회적 요구에 수시로 개편됐다. 시행 첫해 연 2회였던 시험 횟수는 난이도 조절 실패로 비판받자 이듬해 곧바로 연 1회로 바뀌었다. 언어·수리·탐구·외국어 4개 통합교과로 단순화한 시험 구조는 사회·과학 탐구영역 및 제2외국어 선택과목이 추가되며 복잡해졌다. 1점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으려는 과도한 경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성적을 등급으로만 산출하려던 시도가 2008학년도에 있었으나 형평성 논란에 1년 만에 폐지됐다. 쉬운 수능과 어려운 수능(A, B형) 두 가지 선택지를 줬던 2014학년도 실험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학력고사에 비해 과목을 크게 줄이고 지식의 양이 아닌 사고력을 측정하려 했던 수능 도입 취지는 개편이 거듭될수록 퇴색하고 있다. 급기야 성적 상위 1% 이내 우등생마저 서열화하려 초고난도 문제인 '킬러문항'이 등장했고, 이번 정부 들어 대통령이 직접 단속에 앞장섰지만 유명 입시학원 출신이 '전국 1등'을 꿰차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수능 점수로 수험생을 '한 줄로 세우는' 폐단을 막으려 도입된 전형 요소 역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역대 정부는 학교 내신 성적 산출 방식을 두고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김영삼 정부는 5·31교육개혁으로 당시 상대평가였던 내신을 절대평가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김대중 정부는 두 평가 방식을 병행하되 대학이 자율적으로 선택 적용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이 특목고 학생을 뽑을 셈속으로 내신 절대평가를 대입에 반영하자 고교에서는 '내신 부풀리기' 현상이 나타났고, 결국 노무현 정부에서 내신은 9등급 상대평가로 회귀했다. 이후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한 정부가 절대평가 도입을 준비하면 다음 정부가 철회하는 일이 반복됐다.
학생부에 기재할 수 있는 항목은 대학 선발권 중시 기조 속에 크게 늘어났다가 각종 입시 비리가 터지며 다시 축소됐다. 김대중 정부 당시 비교과활동 기재가 확대되고, 이명박 정부에선 입학사정관제가 적극 권장되며 토익 성적 같은 학교 밖 활동까지 대학이 평가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대학 재량권 확대가 부정입학, 고액 수시 사교육 등 부작용을 낳자 박근혜 정부에서 입학사정관제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변경됐고, 이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어학 성적이나 외부 수상 실적 기재 금지, 교사추천서·자기소개서 폐지 등 학생부 기재 범위가 축소됐다.
김영삼 정부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가 1995년 5월 31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발표한 교육 정책 패키지다. 초등교육부터 평생교육까지 전 영역에 걸친 교육 제도를 '민주화' '세계화' '정보화' 등의 목표에 맞게 정비한다는 목표하에 120개 정책 과제를 마련했다. 학교생활기록부, 학교운영위원회, 초등학교 영어교육, 자사고 도입, 교육재정 확대, 전문대학원 도입, 교육법령 정비 등이 대표적이다. 장기적·포괄적 관점으로 지난 30년간 한국 교육정책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영미권의 신자유주의 교육 제도를 수입해 교육 영역에서도 계층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도 따른다.
정부가 대입 제도의 '정답'을 찾지 못한 채 헤매는 동안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사교육 의존은 심해졌다. 저출생에 학생이 줄어드는데 사교육비는 해마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는 이유다. 2007년 773만 명이던 초중고생 수가 지난해 521만 명으로 줄었지만, 이 기간 사교육비 총액은 20조 원에서 27조 원으로 오히려 증가했다.
학부모는 사교육비 부담에, 학생은 공부 압박에 불행하다.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의 주관적 행복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2021년 기준)였다. 교육의 무게중심이 사교육으로 옮겨가면서 교직 불만족도 극에 달해 '다시 태어나도 교사를 하겠다'는 교사의 비율은 19.7%(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올해 스승의날 설문)로 역대 최저였다.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만큼 학생들의 기초 학력은 세계 수위를 다투지만,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우리 교육이 혁신을 이끌 인재를 키우고 있는가에는 의문이 따른다. 오세정 전 서울대 총장은 "선진국 기술을 빨리 배워 적용하는 게 중요하던 시기에는 지식을 빨리 암기하는 능력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라며 "초중고 12년을 입시 교육만 시키니, 아이들에게 새로운 걸 생각하라고 하면 멍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대입 제도만 땜질한다고 과잉 경쟁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 전문가들은 어떤 대학에 입학하느냐가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한국의 특수한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 안전망은 부실하고, 노동시장은 소수의 안정된 정규직과 다수의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됐으며, 대학 서열은 1등부터 꼴등까지 매겨진 현실에서 대입 경쟁 과열은 필연적이라는 것.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지난 30년의 과잉 대입 경쟁, 지나친 사교육비 지출은 일자리 양극화 문제가 교육을 통해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양극화한 사회구조에서 대입은 경쟁 압력의 결정체다. 그래서 이른바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면 편입, 대학원, 평생교육기관 등 다른 교육 통로를 활용하기보다는 수능에 몇 번이고 재도전해 상위 사회 입장권을 쟁취하려 든다. 지난해 수능 응시자의 31.7%는 'N수생'으로 불리는 졸업생이었다. 오 전 총장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 삼수하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 일본밖에 없다. 엄청난 시간 낭비"라며 "미국은 편입이 일반화돼서 대학 1, 2학년 때 더 좋은 대학으로 옮긴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옮겨가는 것"이라고 했다.
입시 제도를 넘어 과열 경쟁의 원인까지 손보는 구조적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한 채, 한국 교육은 인구 감소와 산업구조 급변이라는 파고에 직면했다. 5·31교육개혁의 일환으로 대학 설립 요건이 완화돼 1995년 131개였던 4년제 대학은 190여 개로 늘어났지만, 1995년 65만 명이던 고3 학생은 39만 명으로 감소했다. 2025학년도 4년제 대학 입학정원은 이보다 적은 34만 명이지만, 전문대학에 가거나 대학에 가지 않는 인원을 고려하면 대학 정원이 고3 수험생 수보다 많은 미달 상태다. 2024학년도 수시·정시 모집에서 정원을 채우지 못해 추가 모집을 실시한 4년제 대학은 152개였다.
이런 와중에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이 산업 구조를 뒤흔들면서 대학 구조개혁 압박은 더 심해질 전망이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은 45개국 800여 기업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향후 5년간 AI 기술 적용 등으로 기존 일자리의 4분의 1가량이 영향을 받고 일자리 수는 1,400만 개가 감소할 거라고 내다봤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WEF는 현재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AI가 도입되면 대학에서 받은 교육이 다 소용 없어진다는 것"이라며 "대학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디자인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5·31교육개혁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교육 체계를 전반적으로 돌아보고 새 틀을 짤 때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5·31교육개혁에 관해서는 '교육의 신자유주의화'라는 비판과 '세계적 흐름에 발맞춘 총체적 개혁'이라는 옹호가 공존하지만, 양쪽 모두 '새로운 교육 개혁의 틀'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김용일 한국교육정책연구원 이사장(한국해양대 교직과 교수)은 "지난 30년간 한국은 정권과 상관없이 시장주의적 교육 정책에 경도돼 왔다"며 "계층 간 교육 불평등처럼 5·31교육개혁에서 비롯한 현실에 대해 종합적 진단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입시만 들여다봐선 안 되고 5·31교육개혁에 버금가는 총체적 교육 혁신이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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