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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부부의 애정 그린 이 그림들... 르네상스 역사까지 한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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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예술 작품 한 점에는 질문이 끝없이 따라붙습니다. '양정무의 그림 읽어드립니다'는 미술과 역사를 넘나들며 대중과 함께 호흡해온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여러분의 '미술 지식 큐레이터'가 되어 그 질문에 답하는 연재입니다. 자, 함께 그림 한번 읽어볼까요.
5월은 가정의 달, 가정의 근간이 되는 커플을 그린 불멸의 그림을 다섯 점 선정해서 2회에 걸쳐 나눠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부부 초상화 두 작품을 감상하려 하는데, 공교롭게도 이 두 그림은 각각 르네상스 미술의 양대 산맥인 북부 유럽의 플랑드르와 남부 유럽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준작이어서 흥미로운 비교가 예상된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 ~ 1441)가 1434년에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이다. 작은 방 안에서 남녀 두 명이 한 손씩 맞잡은 채 뭔가를 맹세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남자는 선서하듯 오른손을 들고 있고, 여자는 그것을 차분히 지켜본다. 마치 오늘날 주례 선생님이 앞에서 혼인서약서를 낭독하는 듯해 거의 600년 전 결혼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이 그림의 놀라운 반전은 실제로 화면 안에 주례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신랑 조반니 디 아르놀피니와 신부 사이로 볼록 거울이 벽에 걸려 있는데, 거울 안에 두 명의 남자 모습이 작지만 확실하게 보인다.
거울 속에서 파란색 옷을 입은 인물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얀 반 에이크로 추정된다. 거울 위를 보면 벽에 "얀 반 에이크가 1434년 여기 있었노라(Jan van Eych fuit hic. 1434)"라는 서명이 멋진 필치로 쓰여 있다. 화가가 결혼식의 증인 역할로 그림을 그린 후 그 증거로 자신의 서명과 함께 자기의 모습까지 그려 넣은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일찍부터 이 그림은 웨딩사진처럼 두 남녀의 혼인 장면 혹은 혼인을 서약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해석되곤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림 속 소품들은 결혼의 의미를 강조하는 상징물이다. 털이 복슬복슬한 강아지는 결혼의 충실함을, 창가에 놓인 오렌지는 예수의 수난을, 침대는 성적인 것을 암시할 수 있다. 특히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타오르는 가느다란 초 하나는 성령을 통해 엄숙한 혼인 의식이 벌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해석보다는 성공한 부부의 일상을 담은 초상화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집 안을 가득 채운 소품들은 부를 상징하는 고급스런 사치품이 된다. 예를 들어 볼록 거울은 베네치아에서 만든 것이고, 카펫은 튀르키예, 오렌지는 스페인에서 수입한 것이다. 여기에 번뜩이는 청동 샹들리에와 정교한 가구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부부도 모피와 모직이 잔뜩 들어간 호화로운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참고로 부인은 언뜻 보면 배가 부풀어 임신한 모습 같지만, 자세히 보면 긴 치맛단을 말아서 배 위에 당겨놓고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손을 든 주인공 남자는 누군가를 환영하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거울 속 남성도 손을 들고 있어, 아르놀피니가 부인과 함께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화가 친구인 얀 반 에이크를 반갑게 맞이하는 그림이 된다.
이 그림이 그려진 곳은 오늘날 벨기에의 브루게이다. 이 도시는 15세기 당시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아르놀피니는 이탈리아 중부의 루카 출신의 상인으로 일찍부터 브루게로 이주해 옷감 장사를 하다가 평소에 친분을 맺어 놓은 화가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다.
이제 그림을 다시 한번 보자. 부부는 오늘날로 치면 웨딩사진을 촬영 중인 것인가. 아니면 그림으로 그린 혼인서약서를 갖고 싶어 이 그림을 의뢰한 건 아닐까. 어쩌면 이 그림은 결혼 이벤트와 연결되기보다는 부부의 성공과 부를 기념하기 위한 초상화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아르놀피니의 치켜든 오른손은 결혼의 서약일 수도 있고 우리를 반갑게 환영하는 손짓일 수도 있다. 600년 전 그림 한 점이 이렇게 다채로운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흥미롭기만 하다.
아르놀피니 부부가 알프스산맥 너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커플이라면, 이탈리아에는 우르비노(이탈리아 중부 도시) 공작 부부가 있다.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아르놀피니 부부와 비교해 40년 정도 늦게 그려졌지만 포즈는 더 고풍스럽다. 공작과 부인 모두 고대 로마 황제가 메달이나 동전에 등장할 때 취하던 정측면상 자세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지체 높은 귀족은 언제나 위엄이 넘쳐 보여야 했고, 이 때문에 그림에서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엄격한 분위기의 귀족 초상화에 비하면 작은 방 안에서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는 훨씬 더 다정다감해 보인다.
그림 속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Federico da Montefeltro, 1422~1482)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장군이었다. 서출로 태어났지만 자기 실력으로 공작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 초상화에서 왼쪽 얼굴만 보여주는 데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그는 마상 경기를 하다가 오른쪽 눈을 창에 찔려서 실명했고 이 때문에 왼쪽의 정측면상은 그에게는 다친 눈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자세였다. 한편 그는 오른쪽 눈을 잃고 나서 높은 콧등 때문에 반대쪽을 볼 수 없자 스스로 콧등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눈으로 백 개의 눈보다 더 잘 볼 수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 실제로 그림 속에서 그는 매부리코를 자랑하고 있다.
그는 한쪽 눈으로 자신의 두 번째 부인 바티스타 스포르차를 마주 보고 있다.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무표정하지만 창백한 피부가 뭔가 사연이 있음을 암시한다. 바티스타는 결혼 후 여덟 명의 딸을 낳다가 기대하던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후 폐렴으로 사망하고 만다.
아마도 이 부부 초상화는 우르비노 공작이 죽은 아내에 대한 애도를 담아 두 사람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연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공작 부부가 품위를 지키며 서로를 고결하고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가 거울 속에 반전을 숨겨놓았다면,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그림 뒷면을 통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풀어낸다. 마치 비석처럼 아래 단에 부부의 덕목을 예찬하는 시를 적었고, 그 위에서 부부가 각각 사랑의 신 에로스가 모는 마차를 타고 행진하고 있다.
공작 부부 초상화의 앞면과 뒷면에는 모두 우르비노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우르비노 공작 페데리코는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쳤고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계몽군주였다. 우르비노의 통치자가 된 후 스페인, 영국 등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럽 곳곳에서 재능 있는 문인과 예술가를 초빙해 자기가 통치하는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덕분에 당대 최고의 작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도 우르비노에서 공작을 위해 지금 우리가 보는 멋진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이지적인 세계를 체감하려면 우르비노에 가봐야 한다.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역에 위치해 접근이 쉽지 않지만, 르네상스 최고 교양서 카스틸리오네의 '궁정론'이 쓰이고, 라파엘로가 태어나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우르비노다. 이 정도면 충분한 방문 동기가 될 것이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화와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니 역사적 그림은 역시 역사적 환경을 배경으로 나온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우르비노도 아름답고 우아한 르네상스 도시이고,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가 그려진 벨기에의 브루게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르네상스 도시이기 때문이다.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는 지금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지만,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장소는 분명 브루게이다. 브루게에 가보면 계단식 지붕선의 오래된 집들이 줄지어 이어진다. 이런 집 안에는 여전히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에서 봤던 공간이 존재하고 거기에 아르놀피니 부부를 닮은 이들이 여전히 살갑게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지금까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부부 초상화 두 점을 살펴봤다. 두 그림 모두 탄탄한 구성과 경이로운 디테일로 수백 년 지난 역사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끼게 해준다. 혼자 덩그러니 그려진 단독 초상화보다는 부부가 등장하는 이중 초상화가 과거로의 여행을 두 배는 더 다이내믹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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