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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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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날벼락.' 얼마 전 이 단어가 찰떡처럼 어울리는 경험을 했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의 한 시설에 놀러 갔는데 천장의 철제 구조물이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진 것.
안전사고 발생 후 대처 매뉴얼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 할 말을 잃었다. 처음엔 철제 구조물이 몸의 어디에 부딪쳤는지도 깨닫지 못했다. 어찌어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사고 사실을 알리고 병원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응급실 의사는 "봉변을 당하셨다"고 나를 위로하며 컴퓨터단층촬영(CT)과 엑스레이(X-ray)를 찍어줬다. 다행히 큰 골절이나 내상은 없었다.
하지만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사고에 책임을 지는 곳이 없어서였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는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사무소가 천장 구조물 관리를 소홀히 한 게 문제라고 했고, 관리사무소는 아파트를 시공한 건설사의 책임이라고 넘겼다. 건설사는 자신들이 커뮤니티센터 시공을 맡긴 하청 건설사의 잘못이라고 했다. 하청 건설사는 다시 관리사무소의 관리 소홀이 문제라고 했다. 멀쩡해 보였던 천장 구조물이 갑자기 떨어진 이유가 뭔지, 다른 시설물은 안전한지, 앞으로 재발 방지책은 어떻게 세울 건지 등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최종 책임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는데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도돌이표가 반복돼 현기증이 날 때, 불현듯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떠올랐다. 부끄럽지만 유가족의 억울함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했달까.
2022년 10월 29일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159명이 갑작스레 목숨을 잃었다. 유가족은 정부가 비극이 발생한 이유를 찾고 책임도 분명히 가려주길 바랐을 것이다. 사고 4시간 전부터 '인파가 너무 많아 관리가 필요하다'는 112 신고가 쏟아졌는데 왜 인원 통제를 하지 않았는지, 사고 전날 수만 명이 몰려 압사 사고 우려가 컸다는데 왜 대비를 하지 않았는지, 사과는 누구에게 받아야 하는지 유가족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발생 당시 "책임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한다"고 했다. 재난안전 관리 총괄을 맡고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경질 여론에 선을 그으면서 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19개월 동안 철저한 진상 규명은 물론 윗선 문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사이 참사는 정치화했다. 민주당은 책임을 대신 묻겠다며 지난해 2월 이 장관에 대한 탄핵안을 처리했으나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됐다. 올해 1월에는 민주당 주도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자 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막았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합의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이달 2일에서야 통과했다.
쉬운 길을 멀리 돌아오면서 유가족의 마음만 멍들었다. 유가족들은 '놀러 갔다 죽은 아이들의 가족'이라는 비아냥을 견디며 폭우 속에서 삼보일배를 하고, 한겨울 눈밭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진상규명을 외쳐야 했다.
이제 특조위는 사실관계와 구조적 무능을 면밀히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 국민 안전을 위한 제도 개선을 이끌어 내야 한다. 적어도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어떻게 책임 있게 행동하고 사과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자가 붙어 불어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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