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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문학에서 홀대받다 150년 후 영국 최고 소설 된 '미들마치'

입력
2024.05.03 11:00
25면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 위키미디어 커먼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 위키미디어 커먼스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 작품이 그랬듯이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1871~1872)도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서 홀대받았다. 한국의 경우는 더 심했던 것 같다. 30년 전쯤에 번역 출간된 이후 거의 잊힌 작품이었다. 문학 고전을 다루는 책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니 대형출판사의 고전 목록에 등장하지 않은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2016년 정도부터 영어판 전자책이 인터넷서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 그 텍스트였다.


바뀐 시대가 알아본 여성 작가들

이 작품이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2015년 영국 BBC방송의 문화 설문조사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BBC에서는 그해 말에 영국을 제외한 전 세계 전문가 82명을 대상으로 ‘최고의 영국 소설’이 무엇인지 물었다. 거기에는 서구의 유명 평론가나 리뷰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도 포함돼 있었다. 놀라운 것은 ‘위대한 작품 100편’의 40%가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1위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였을 뿐 아니라 2, 3위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들이었으며, 브론테 자매의 작품과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도 10위권 안에 들었다.

그러나 영문학자들이 그렇게나 떠받들었던 남성 작가들인 제임스 조이스나 존 밀턴은 없었다. 대의 남성 작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평가는 이전 영문학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엎은 결과였다. 시대와 관점이 변하면 작품에 대한 평가도 매우 심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2019년에 30년 전 한국어로 번역됐던 ‘미들마치’가 재출간됐다. 어쩌면 그때쯤 대형출판사도 번역하기로 결정했는지 모른다. 한국어판으로 1,400쪽이 넘는 대작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 아니라 돈도 많이 드는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아도 늦은 감이 있다. 2024년 초에야 민음사에서 새로운 번역판 ‘미들마치’가 출간됐고, 드디어 ‘현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알 만한 사람들은 알지만 읽은 사람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던 그 유명한 작품이 이제야 선을 보인 것이다.

미들마치 1·조지 엘리엇 지음·이미애 옮김·민음사 발행·720쪽·1만8,000원

미들마치 1·조지 엘리엇 지음·이미애 옮김·민음사 발행·720쪽·1만8,000원


결혼 후 실제 삶을 보여준 소설

이 작품은 시작과 마무리에 작가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서문에서 아빌라의 테레사를 언급한다. 16세기에 스페인 아빌라에 살았던 위대한 성인이었으며 가르멜 수녀회를 개혁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성인들의 이야기에 감명받아 오빠와 함께 ‘무어인’들과 싸우고 순교하겠다며 집을 떠났다. 그러나 도시 성벽 밖에서 삼촌에게 발견돼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훗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위대한 포부’를 실현하고 성인이 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소설의 모티브로 삼았다.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도러시아 브룩은 여동생 살리아와 함께 ‘삼촌’에게 양육됐다. 그는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영웅적인 일을 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스스로 갇힌다. 남편이 되는 캐소본은 26살이 많지만 그의 지적인 모습에 반해 그를 통해 자신도 지적인 성장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결혼생활에서 아내는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이상의 역할은 그 누구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그 남편은 일찍 죽지만 죽으면서도 유서를 통해 도러시아의 행동을 통제한다. 도러시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은 재산을 포기하고 남편의 젊은 친척이었던 래디슬로와 재혼하는 것이 전부였다. 서문에서 경고한 대로 20세기 초반의 영국 사회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혀 있는 절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대단한 재능을 가진 도러시아가 무력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작가인 엘리엇의 파격적인 삶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지 엘리엇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영국 잉글랜드 중부 워릭셔주 너니턴에 있는 그의 동상. 위키미디어 커먼스

조지 엘리엇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영국 잉글랜드 중부 워릭셔주 너니턴에 있는 그의 동상.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 소설의 부제가 ‘지방 생활 연구’이듯이 한 사람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미스 브룩’으로 시작하지만 주변의 인물 세 쌍을 통해 ‘지역 생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가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졌던 여성의 지위가 중요한 초점이고,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주민들의 일상, 사리사욕과 관련된 문제, 종교와 정치개혁, 교육에 대한 문제들을 결혼생활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전의 여성 작가들 소설과 달랐다.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이후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울프는 "성인을 위해 쓰인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뛰어난 리얼리즘 작품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

소설 속 프레드와 메리는 둘 다 미들마치 토박이로 평범한 상류층 사람이다. 프레드는 미들마치 시장의 아들로 엄청난 부자인 삼촌 페더스톤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공부를 게을리한다. 그러나 페더스톤은 자신의 사생아에게 모든 재산을 남기고 죽는다. 메리는 낙심한 프레드를 채찍질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게 만들고, 마침내 프레드는 자립해 메리와 결혼한다. 여성에게 남편이란 다루기 나름인 존재였던 것이다.

외지인 의사인 리드게이트와 미들마치 토박이인 로저먼드는 프레드의 여동생이다. 리드게이트는 과학적인 의학에 전념해 새로운 발견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사치스럽고 이기적인 로저먼드와 결혼하면서 재정적인 곤경에 빠진다.

마지막으로 불법적으로 부자가 되어 미들마치의 은행장이 된 불스트로드와 건달이자 사기꾼인 존 래플스가 이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의 연결고리가 되어 비밀을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래플스가 불스트로드를 협박해 돈을 뜯는 과정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숨겨진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래플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불스트로드는 그의 곁을 지켰기 때문에 살인 의혹을 받는다. 그렇지만 불스트로드는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눠준다. 이후 주요 등장인물들의 삶은 대개 해피엔딩에 가깝다.

조지 엘리엇. 위키미디어 커먼스

조지 엘리엇. 위키미디어 커먼스

작가는 ‘피날레’라는 제목의 장에서 그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간단하게 정리해서 보여준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밝힌다. 서문에서 말했던 성 테레사의 영웅적인 삶과 도러시아 이야기의 영향력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은 필자가 번역한 마지막 문단이다.

"그녀의 섬세하고 감동적인 영혼은 가치 있는 결과를 낳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키러스 왕이 강의 기세를 꺾어 수만 갈래로 흩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만들었던 것처럼 그녀의 풍부한 성품은 이 세상의 이름 없는 수로에서 흘렀다.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게 퍼졌던 것이다. 세상이 조금씩 더 좋아지는 과정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위들에 의한 것이다. 우리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은 충만한 삶을 살았지만 잊혀진 무덤에서 쉬고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 덕분이기도 하다."

좋은 작품은 한 번만 읽을 수 없다. 필자는 네 번 읽었다. 아마 또 읽을 것이다. 대단한 사건도 특별한 영웅도 없이 밋밋하지만 이상하게 자극적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삶에 담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세심한 반성이 감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도 내 생각과 비슷한 것 같다. 그는 글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이 소설을 읽는 외국 작가 가운데에는 레베카 메드가 있다. 그는 ‘내 인생의 미들마치’라는 에세이집까지 썼다. 이처럼 고전은 되풀이해서 읽는 걸작이다. 이 소개글이 독자들을 작품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이 되면 좋겠다.



강창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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