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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 관계에서 최악의 원수로...이란과 이스라엘의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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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숫자로 표현되는 경제학 역시 오랜 역사를 거치며 정립됐습니다. 어려운 경제학을 익숙한 세계사 속 인물, 사건을 통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보려 합니다. 경제 관료 출신으로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으로 근무하는 조원경 교수가 들려주는 ‘세계사로 읽는 경제’는 2주에 한 번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12월, 분쟁지역인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하고 미국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예루살렘이 이미 오랜 기간 이스라엘의 지배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는 아랍권의 공분을 불렀다. 그래서였을까. 현재 이스라엘 집권세력은 하마스와 전쟁을 계속 이어가며 미 대선에서 트럼프의 승리를 기다리는 게 가장 유리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하려 한다. 2025년까지 전쟁은 이어진다는 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말이다. 전쟁을 최대한 길게 끄는 게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4월 1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란 영사관 건물을 공습해 13명이 사망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이에 13일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300여 대의 무인기(드론)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란이 사상 최초로 이스라엘 본토를 직접 공격한 것이다. 다시 18일 이스라엘 미사일이 이란을 강타함으로써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으나, 이란 측이 “추가 보복대응을 하진 않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당분간 상호 타격은 없어 보인다. 외려 서로 간 ‘약속대련’의 인상까지 깊어지는 양상이다. 역사 속 이란과 이스라엘 간 공생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영국이 주도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 유엔에 상정됐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국가, 아랍인 국가, 예루살렘으로 분할하는 안건으로 미국과 소련이 주도해 통과했다. 194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 통치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근거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한다. 이에 반발한 아랍 연맹이 이스라엘을 상대로 1차 중동전쟁을 일으킨다. 영국군이 철수한 바로 다음 날 이집트 전투기가 이스라엘을 폭격했다. 1948년 6월 스웨덴 중재로 휴전 협정이 시작했다. 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은 미국 지원으로 힘을 키운 뒤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뒀다. 당시 이란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에 반대했으나 참전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 외교사절단은 1949년에 유엔총회의 원년 멤버로 가입했다. 이란은 이스라엘의 유엔 가입을 반대했지만, 이후 1950년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게 된다. 주요 이슬람 국가 중에선 튀르키예에 이어 두 번째 승인이었다. 유럽에 망명 중이던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1953년 왕위에 다시 오르면서 양국은 더 빠르게 가까워졌다. 정식 수교는 하지 않았지만 대표부를 두고 텔아비브와 테헤란을 잇는 직항편도 운항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비아랍권 국가로 분류하고 우호 세력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란은 중동에서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의 본거지였다. 이란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제국과 관련한 유대인의 후손이다. 페르시아제국이 절정에 달했을 때 유대인이 인구의 20%를 차지했다. 1948년 이란 내 유대인 인구는 10만~15만 명으로 추정된다. 1978년 이란 혁명 직전 약 8만 명으로 감소하는데, 대부분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중동에서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은 유대인 인구가 이란에 산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으로 구성한 연합군과 치른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1967년)’ 이후에는 석유의 상당 부분을 이란에서 수입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이란산 석유를 보낼 송유관과 항만 시설을 운영하는 양국 기업 간 합작회사도 운영했다. 양국은 ‘플라워(flower)’란 이름의 탄도미사일 공동 개발 프로젝트(1977~79년)도 실행했다. 경제협력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뭉쳤던 양국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갈등과 반목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3차 중동전쟁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비롯한 아랍권 독재정권은 국민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정권에 대한 실망은 이들 정권의 기반인 아랍 내셔널리즘과 아랍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로 이어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이슬람주의였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이어졌다. 1979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 혁명을 일으킨다. 이를 통해 팔레비 왕조를 축출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웠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이란 간 양국 관계는 급랭했다. 이란 혁명 정부는 이스라엘을 ‘이슬람의 적’으로 규정했다. 미국이라는 ‘큰 사탄’ 옆에 기생하는 ‘작은 사탄’이라고 욕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불법 점령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모든 공식 관계를 단절했다.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의심할 여지 없이 뿌리 뽑히고 파괴돼야 하는 암적 종양"이라고 불렀다.
국제 관계에서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다. 1980년에서 1988년까지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란과 이스라엘 간 잠시나마 이뤄진 군사 밀월이 대표적이다. 당시 이라크의 핵개발을 우려하던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지원하고 군사고문관을 파견했다. 이란이 전쟁 발발 직후 구입한 무기의 약 80%가 이스라엘에서 온 것이란 말이 돌았다. 이스라엘은 그 대가로 이란으로부터 석유와 함께 이라크 군사시설과 관련한 상당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 호메이니 정권은 전쟁 중에도 이스라엘에 이를 갈았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파인 헤즈볼라에 무기를 제공하고 군사훈련까지 시켰고 1990년대부터 헤즈볼라의 테러가 이스라엘을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헤즈볼라의 테러는 1992년 29명이 숨진 아르헨티나의 이스라엘 대사관 폭탄 테러로 지구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94년 85명의 사망자를 낸 아르헨티나-이스라엘 친선협회 건물 폭탄 테러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배후로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을 지목했지만 이란은 이를 부인했다.
2000년대 들어 이란이 핵개발에 나서면서 양국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2005년 우라늄 농축을 재개한 이란은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고 겁박했다.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과학자들을 암살하고 2010년엔 이란 우라늄 농축시설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서로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의 자산을 공격하며 수년간 그림자 전쟁을 벌여왔다. 이란이 지원하는 무장 단체 중 헤즈볼라가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거의 매일 이스라엘과 국경을 넘나들며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하마스(팔레스타인), 헤즈볼라(레바논), 후티(예멘)는 이란의 과격한 친구들이다. 예멘 소재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하자 지난해 11월 19일부터 홍해·아덴만 등에서 민간 상선을 대함탄도미사일·순항미사일·무인기로 공격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기에 이란 핵협정 파기(2018), 아브라함 협정(2020, UAE와 이스라엘 간의 외교 정상화)으로 굵직한 정책을 공조하며 이란을 고립시키려 했다. 이에 이란은 이스라엘의 중동 국가 간 관계 정상화를 훼방 놓아 이스라엘을 ‘중동 내 왕따’로 고립시키는 전략을 계속 구사했다. 이란과 대립 관계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은 이란을 괴롭게 했다. 이슬람 국가가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는 것은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이 때문에 이란의 군사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기습 공격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추진하던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는 모두 멈췄다. 이란이 놓은 덫에 이스라엘이 걸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스라엘은 미국과 서방 동맹국의 도움을 얻어 이란이 발사한 무인기 및 미사일 300여 대 대부분을 격추했다. 이스라엘이 다시 이란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격했고 이란은 미사일이 날아왔다는 보도를 부인했다. 서로 확전을 자제하는 분위기라 5차 중동전쟁은 없어 보인다. 다만 미국 기준금리 인하 지연으로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중동 갈등은 세계 경제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리더십 발휘가 너무나 중요한 시기다.
조원경 UNIST 글로벌산학협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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