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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법원, 민망한 판사

입력
2024.04.23 19:00
25면

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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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나이키 신발을 판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변호인이, 진품 여부를 감정한 사람을 상대로 반대신문을 하던 중이었다.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던 변호인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집었다. 신문사항에는 '(사진을 제시하고) 정품과 짝퉁이 도대체 어디가 다른지 구분해 보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변호인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사진을 올려놓을 실물화상기를 찾지 못해서였다. 그는 부산 동부지원 303호 법정에 설치된 실물화상기가 법대 아래 1대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변호인과 검사가 사진을 들고 분주하게 자리를 들락거릴 때마다 치열하게 이어지던 신문 열기가 차갑게 식었다.

지원장을 통해 실물화상기를 피고인석과 검사석에 각각 설치해 달라고 행정처에 요청한 것도 여러 번. 그때마다 기다려 달라는 답변만 반복됐다. 그러기를 2년째. 하도 답답해 실물화상기 가격을 검색해 보니 20만~30만 원대였다(알리에는 10만 원대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내돈내산' 하고 싶었으나 명색이 법정인데 사제 기계로 재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가난한 부모 속이 문드러지는 걸 잘 알지만 돈 달라고 조르는 자식도 괴롭긴 매한가지다. '실물화상기 한 대 못 주면서 좋은 재판하라고 닦달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라고 틈날 때마다 지원장에게 화풀이했는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인지 내가 지원장이 됐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모른다. 지원이긴 해도 그래도 기관장인데 궁핍한 살림 얘기를 꺼내는 게 남사스럽지만 임신한 실무관이 기록운반용 카트를 사비로 샀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체면 차릴 형편이 아니다.

그래픽=박구원기자

그래픽=박구원기자

2024년 전체 국가 예산에서 대법원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0.33%다. 순위로 치면 61개 부처 중 22위다. 방위사업청(11위), 경찰청(14위), 국가보훈부(18위), 법무부(19위)는 물론이고 산림청(21위)보다 낮다. 국가 예산이 600조 원대로 편성되어 '슈퍼예산'이라는 말이 나왔던 2021년에도 대법원 예산만 531억7,800만 원 삭감됐다. 법원은 생각보다 돈이 훨씬 없다. 그나마 예산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주목도나 비난받는 정도로 보자면 법원이 국가 기능의 0.33% 이상 몫을 하고 있음은 분명한 것 같은데, 야속한 마음도 든다.

도대체 사법부 예산은 누가 정할까? 정부다. 현행법상 예산안의 편성과 제출은 정부만 할 수 있고 국회가 심의·확정권을 갖는다. 국가재정법 제40조에는 대법원 등 독립기관의 예산편성은 기관의 의견을 존중하고 삭감할 경우 국무회의에서 기관장의 의견을 듣게 되어 있으나, 실제 예산편성 과정에서는 대법원도 일반 행정부처와 마찬가지로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설득작업을 해야 한다.

여기서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 하나. 행정부가 사법부 예산을 쥐락펴락하는데도 삼권 분립이 보장될 수 있는가? 미 법무부 장관이던 호머 커밍스(Homer Cummings)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문제의식 끝에 1938년 미국에서는 사법부 등 헌법상 독립기관이 제출한 예산요구서를 대통령이 변경 없이 국가 전체 예산안에 그대로 포함시켜 의회에 송부하도록 하는 내용의 'Act of 1939'가 탄생했다(한윤옥 부장판사). 정부가 사법부 예산안을 마음대로 삭감하는 우리와는 엄청난 차이다.

안보나 치안, 보훈과 나무보다 재판이 더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지원이 늘수록 더 빠르고 좋은 재판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뚝 선 나무만큼 사법부의 독립도 중요하다. 이 말을 하고픈 것이다.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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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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