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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봄은 어떤 색과 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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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기억이 유난히 깊고 선명한 건 이 계절이 동반하는 색채와 냄새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년기부터 내게 각인된 봄은, 쿰쿰한 거름 냄새로 시작되었다. 더러 코를 막기는 했어도 이 냄새가 싫지 않았다. 들판 곳곳에서 나는 거름 냄새는 냉이와 쑥의 달큰한 연두색이 우리 곁으로 달려오는 신호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봄날은 밀물처럼 덮쳐와 아찔한 색과 향으로 우리 감각을 지배했다.
3월 초에 땅속 깊이 묻은 감자와 완두, 강낭콩, 옥수수 씨앗이 손바닥만큼 크고 넓은 싹을 틔워 올렸다. 초여름 같던 며칠 덕에 초록마저 감도는 녀석들이 잡초의 공세를 이겨내고 실한 열매를 맺도록 단속해야 할 시점이었다.
토요일 새벽, 감자밭으로 들어갔다. 하나의 씨감자에서 돋아난 여러 개 순 중 가장 튼튼한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잘라내는 순치기와 감자 순 주변을 흙으로 북돋워 주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자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아침 공기에 연한 배꽃 냄새와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여는 라일락의 알싸한 향이 배어 있었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완창하고, 내친김에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ᄒᆞᆫ 님…,' 부안 기생 매창의 시조까지 읊조리며 일하는데 "고모! 서울 고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 부모보다 일찍 일어나 거실 창밖을 내다보던 네 살 조카가 저 아래 감자밭에 쪼그려 앉아 일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잠옷 바람에 빨간 장화를 신고, 손에는 꽃삽을 쥔 아이가 언덕을 내달려 내게로 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는 물음에 아이는 "고모, 나는 부지런한 편이야. 해가 뜨면 내 눈도 저절로 떠져"라며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꽃삽을 내밀며 일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3월 초 파종할 때도 아이는 내 곁에 붙어서 같이 일하자 졸랐고, 나는 씨앗이 든 작은 바구니를 아이에게 건넸다. "윤하야. 여기 이 구멍에 감자는 한 알, 콩과 옥수수는 두 알씩 씨앗을 넣어줄래?" 그렇게 합심해서 심은 씨앗이 이만큼 자랐으니 이 작물들은 아이에게도 각별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어린 딸이 잠옷 바람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봄 햇살 아래 나간 걸 제 엄마가 안다면 내게도 불똥이 튈 게 뻔했다. 아이를 살살 달랬다. "열심히 일하려면 아침밥 든든히 먹고, 선크림도 바르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거 윤하도 알지? 엄마가 보고 놀라기 전에 얼른 들어가. 가서 밥 먹고 옷 갈아입고 나오자, 응?"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가 뒤돌아서 밭을 빠져나갔다. 달려오던 때의 기민함 대신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로 느릿느릿 걸어가던 아이가 방향을 틀어 밭둑에 심긴 능수벚나무로 향했다. 떨어지는 꽃잎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몸을 돌려 이제는 집으로 가는가 싶더니 길가 살구꽃에 코를 대보고, 유채 꽃에 날아든 나비를 발견하고는 또 해찰을 부렸다. 그러다 이웃집 감나무 위에 앉은 박새를 발견한 순간, 세상 물정 다 안다는 듯 건방지게 짝다리를 짚더니 본격적으로 새의 동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밭고랑에 퍼질러 앉아서,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다보았다. 윤하야, 네 봄은 어떤 색깔과 냄새와 풍경으로 각인될까. 그 기억 한 귀퉁이에 나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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