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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잊으라고? 세월호를 못 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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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오늘부터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커다란 배가 기울어진 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장면이 엊그제 일인 듯 생생하다. 수면 위로 선체가 일부라도 보였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갈 때, 배 안에는 수학여행길에 나선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배에 오르며 한껏 들떴을 앳된 청춘들이 가여워 많이도 울었다. 10번째 돌아온 4월 16일.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에 책임이 부재했음을 상기하는 내내 슬픔과 분노의 기억이 인출됐다.
매듭짓지 못한 탓이었을까. 참사는 이어졌다. 축제를 즐기러 모였던 159명이 이태원 좁디좁은 골목에서 황망히 스러졌다. 걷잡을 수 없이 인파가 몰린 장면이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뒤섞여 머릿속에 저장됐다. 이 기억도 10월 29일마다 인출될 것이다.
뇌는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보다 오래 저장한다. 나쁜 기억이 시냅스에 더 큰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의 미세한 틈인 시냅스는 신호를 전달하는 화학물질이 오가는 통로다. 새로운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 뇌로 신호가 들어오면 시냅스가 화학물질을 더 활발히 전달해 신경세포들 간 연결을 견고히 하거나 다른 신경세포들과 새로운 연결망을 만든다. 시냅스가 이렇게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무서웠던 일이나 충격적인 장면, 힘들었던 경험 같은 나쁜 기억은 시냅스의 가소성을 극대화한다. 신경세포 연결망이 워낙 크게 바뀌다 보니 그 변화가 오랫동안 유지된다. 기억이 오래 남는다는 얘기다. 뇌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해마와 대뇌피질이다. 두 귀 윗부분 안쪽에 있는 해마엔 몇 주에서 한두 달을 넘기지 않는 단기기억이 저장된다. 그 이상 지속되는 장기기억은 대뇌의 가장 바깥 표면, 즉 피질에 자리 잡는다.
저장된 기억은 의도하지 않아도 인출될 때가 있다. 실험용 생쥐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경험을 반복시켰더니, 해마 근처에 있으면서 감정을 담당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와 흥분성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이 튼튼해졌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학습 기억과 공포 감정이 강하게 연결됐다는 의미다. 흥분성 신경세포가 시도 때도 없이 활발해진다면 생쥐는 엉뚱한 데서도 공포를 느낄 것이다.
신경세포는 신호를 활발히 받아들이는 흥분성과 그 반대인 억제성으로 나뉜다. 억제성 신경세포는 평소 흥분성 신경세포가 아무 때나 활발해지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생쥐에게 공포 학습을 했을 때와 같은 소리를 듣게 했더니 억제성 신경세포가 약해졌다고 한다. 생쥐의 흥분성 신경세포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활동을 늘리며 과거 저장됐던 공포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 생쥐는 실험과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나쁜 기억은 시냅스 변화가 오래 유지되기 때문에 약한 연결고리에도 쉽게 다시 인출될 수 있다.
10번째 4월이 오는 동안 아이가 고등학생이 됐고, 올해 수학여행을 간다. 배는 타지 않을 거고, 인파가 크게 몰리는 곳도 아니란 걸 알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평소에도 유동인구가 많을 때 아이가 대중교통을 탄다 하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대뇌피질에 저장돼 있는 참사의 기억이 인출되며 만들어내는 예민함일 터다.
과학자들은 기억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애써왔다. 약 120년 전부터 기억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 뇌에 저장된다고 여겼다. 어떤 이들은 그 실체가 시냅스에 있을 거라 하고, 다른 이들은 신경세포 유전자에 있을 거라고도 한다. 세월호와 이태원의 기억은 뇌에 새겨진 물리화학적 기록이다. 잊으라 강요한다고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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