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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이란 사랑을 여전히 믿는 자를 보는 시혜적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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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어쩌면 촉각은 아주 가끔만 기능하는 게 아닐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지금 내게 닿아 있는 모든 것을 느낄 순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입고 있는 옷, 시계, 신발 같은 것의 질감을 매 순간 모조리 느끼면서 산다면 미치고 말 것이라는 확신. 그럼에도 종이에 살짝 베인 상처에, 허벅지에 쏟아진 국물의 뜨거움에, 우리의 촉각은 무섭게 되살아나곤 한다.
삶을 감각하는 순간도 촉각과 닮았다. 아주 오래도록 덮고 있던 담요에서 튀어나온 작은 실이 발가락에 걸린 것처럼 살아 있다는 감각은 아주 가끔만 찾아온다. 그 외의 날들은 무감하고, 삶은 대부분의 순간 잊혀 있다. 그래서 하루는 길고, 삶은 아주 짧게 느껴진다.
김남숙 작가의 단편소설집 ‘아이젠’ 속에 흐르는 하루들은 무감하고 지루하다. 화자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무뎌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 저돌적으로 삶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을 찾아낸다. 수록작 ‘이상한 소설’을 예로 들자면 화자 외의 다른 인물들은 끝없이 삶이 나아지길 기원하는데, ‘종수’는 주유소 소장이 죽길 기도하고 ‘치과의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화자는 그런 그들을 귀여워한다. 그 귀여움은 삶을 사랑했기에 더 이상 사랑하길 단념한 자가 아직도 사랑을 믿는 자들을 보는 시혜적 태도처럼 느껴진다.
‘이상한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인물들은 계속해서 화자의 주변 인물로 등장한다. 표제적 ‘아이젠’에서는 ‘두치’가 그러하며 ‘파수’에서는 ‘성아’, ‘제수’에서는 ‘제수’가 그러하다. 그리고 화자가 귀여워한 인물들은 언제나 그에게 상처를 준다. 화자는 그 상처를 온전히 느끼면서 그제야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어떤 소설은 삶을 완전히 잊게도 하지만, 어떤 소설은 삶의 감각을 불러온다. 김남숙의 소설은 후자에 가까운 소설이다. 그의 소설 속에 그려지는 삶에 대한 완전한 체념과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흘러가는 하루. 그러나 그 체념이, 그 삶이, 그 공허한 하루가 너무나 ‘진짜 삶’을 닮아 있어서 읽는 이는 역으로 삶을 감각하게 된다. 목뒤에 꺼끌거리는 새 옷의 라벨이 느껴지는 순간처럼 삶의 감각이 날카롭게 돌아올 때 불현듯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렇게 쏟아져 내린 삶은 불유쾌한 것들을 가득 담고 있어서 마치 통증과도 닮아 있다.
문득 삶의 아름답지 않은 순간-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순간-들을 그러모으는 김남숙 작가의 소설 쓰기가 과연 즐거울지 궁금해 작가의 말을 찾아보았다. 작가는 ‘어떤 사람들은 실소하겠지만 나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 나를 어느 정도 개호할 수 있는 방법처럼’, ‘나를 덜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한다’고 썼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도록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은 뒤 발가락에 걸린 작은 실을 걷어내고 다시 익숙한 담요 안으로 기어들어 가면 그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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