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갑질 녹음해도 될까... "사무실 다 들릴 욕설은 가능"

입력
2024.04.15 16: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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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폭언 시 '몰래 녹음' 어디까지 허용될까
본인은 참여 않은 제3자 간 대화 녹취는 위법
당사자가 한 녹음도 함부로 공개하면 위험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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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의 음성 녹음이 불법인가요? 최근 제 상사 언행이나 태도 때문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했고, 폭언을 일삼는지라 근무시간에 녹음했습니다. 그런데 회사 내에서 녹음이 불법이네 아니네 왈가왈부가 있어 질문드립니다.

2024년 1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올라온 질문

직장 내 갑질·폭언 시 녹취록은 '핵심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이 참여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를 녹음하면 형사처벌감이다. 본인이 직접적인 대화 당사자는 아니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가 자연스럽게 듣게 됐다면? 이 경우 '녹취가 허용된다'는 법원 1심 판결이 나왔다.

대구지법 형사11부(부장 이종길)는 이달 2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공공기관 직원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한 배심원 7명도 모두 '무죄' 의견을 냈다. 평소 상사 B씨가 사무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써서 고충을 겪던 A씨는, 2021년 12월 B씨가 사무실 내 다른 직원 두 명 앞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기관장 욕을 시작하자 본인의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이를 녹음했다. A씨는 이듬해 1월 B씨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사팀에 신고하며 이날 녹취록도 증거로 제출했다가, 통비법 위반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게 됐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A씨도 녹음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대화 당사자로 볼 수 있냐'였다. 통비법 제3조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는 녹음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즉 직장 내 괴롭힘 증거를 모을 목적이라도 본인이 대화 당사자가 아니라면 불법인 것이다.

법원은 "B씨가 사건 당시 사무실 중앙 쪽에서 발언해 사무실 내 직원이 모두 자기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직원 진술, 실제 사무실 구조와 크기를 고려할 때 A씨가 본인 자리에서 B씨 발언을 충분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A씨를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사실상 다 들으라고 행한 발언을 같은 장소에 있어서 듣게 된 사람도 대화 당사자로 볼 수 있어 (녹취가) 합법이라는 첫 법원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 추진위원 권두섭 변호사는 "공개된 사무실에서 피해자를 앞에 두고 다 들으라는 듯 모욕적 발언을 할 때 동료가 녹취를 해준 경우에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직장갑질119는 다만 "본인이 없는 장소에 녹음기를 놓아두고 녹음하면 통비법 위반이며, 합법적으로 녹음했어도 신고 등 목적이 아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개하면 모욕죄나 명예훼손에 해당할 수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증거 수집을 위한 녹음 시 △녹음기를 반드시 몸에 지닌 채 녹음하고 △녹음 내용을 신고용으로만 사용하며 △갑질 가해자의 '불법 녹음' 협박에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게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단체는 조언했다.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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