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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슴이냐" 압박하며 과적 지시…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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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는 어느 날 느닷없이 침몰한 사고가 아니었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이들이 조금씩 쌓아온 부조리가 한 번에 무너져 터진 재앙이었다. 한국일보는 지난 10년간 3차례 구성된 세월호 조사위원회 활동 결과와 검찰·경찰의 수사, 과학자들의 연구·분석 등을 통해 확인된 팩트로 세월호 참사의 과정을 다시 정리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비극으로 향하는 고리를 잘라냈다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던 참사였다. 최근 발간된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세월호는 4월 16일 갑자기 기울었을까.
그렇지 않다. 참사 직전 5개월 동안 세 차례나 배의 이상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졌었다. 하지만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이를 무시했다. ①2013년 11월 29일에는 승객 117명을 태우고 제주로 가던 중 추자도 인근에서 왼쪽으로 15도 기우는 사고가 났다. 재앙의 전조였다. 컨테이너 위에 대충 쌓아둔 양주와 벽돌이 쏟아졌고 욕조 등이 깨졌다. ②2014년 1월 20일에는 제주항에서 출항하려다 두 번이나 실패했다. 강풍 탓이 컸지만 선박 자체의 문제도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예스맨'으로 평가받던 선장 이준석이 "안전을 위해 선박 구조를 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요청할 정도였다. ③참사 한 달 전인 3월 10일에는 지게차들이 세월호 화물칸에 짐을 실어 나르던 도중 배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선사는 이 징후들에 특별히 대처하지 않고 넘어갔다.
세 차례 사고 모두 복원성(기울었을 때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문제였다. 정상인 배는 파도를 맞거나 뱃머리를 돌려도 잠시 기우뚱했다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다. 하지만, 세월호는 달랐다. 이 배의 원래 선장인 신보식은 참사 이후 검찰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가 6,825톤짜리 배인데 지게차 몇 대 다녔다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겠습니까? 다 복원력 탓이죠. 이러다 배가 넘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세월호의 복원성은 엉터리 증개축 탓에 나빠졌다. 복원성은 배의 무게중심이 낮을수록, 가로 면적이 넓을수록 좋다. 청해진해운은 승객을 더 태울 욕심에 세월호의 4, 5층 객실을 키워 무게중심을 높였다. 여기에 컨테이너를 더 싣기 위해 40톤 무게의 우현 차량 진입로를 철거해 배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선사의 탐욕 때문에 비극이 싹튼 셈이다.
-그렇게 형편없는 배가 어떻게 운항을 허가받았나.
모두가 원칙을 지켰다면 세월호는 떠다닐 수 없는 배였다. 하지만 안전 관리 기관들의 무책임과 부패 탓에 취항할 수 있었다. 청해진해운은 2012년 10월 일본에서 18년 된 중고 선박 한 척을 사들여 마구 뜯어고친다. 선박을 개조하면 검사기관인 한국선급에서 경사시험을 받아야 한다. 배가 텅 빈 상태에서 중량과 무게중심 높이를 측정하는 절차다. 시험은 엉터리로 진행됐다. 검사원 전종호는 원칙을 어기고 공사가 끝나기 전 경사시험을 했다. 청해진해운 하청업체들이 계측한 자료를 그대로 인정했다.
인천해경 해상안전과장 장지명이 맡은 세월호 시험운항도 엉망이었다. 그는 세월호의 제주항 여객선터미널 접안 과정만 잠시 살폈다. 이후 4박 5일은 제주 주요 관광지를 돌아봤다. 숙소비를 제외한 식대 등은 모두 청해진해운이 댔다. 장지명은 세월호에 합격 판정을 내려줬다.
-참사 당일 세월호는 어떤 상태로 출항했나.
돈벌이가 되는 화물은 과적했고,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는 제대로 채우지 않았다. 언제라도 넘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얘기다. 선조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이 배는 당시 2,210톤의 짐을 실어 최대 적재량을 배 이상 넘겼다. 평형수는 최소 기준치(1,694.8톤)의 절반도 안 되게 넣었다. 과적은 이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직원들은 회사가 "우리나라 카페리(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선박) 중 규정대로 짐을 싣는 배가 어디 있느냐"고 다그치거나 "새가슴이라 화물 예약을 적게 받는다"고 질책했다고 증언했다.
-세월호가 참사 당시 급선회한 원인은.
세월호의 당직 조타수 조준기의 말에 이유가 숨어 있다. 그는 참사 당일 오전 8시 49분쯤 배의 핸들 격인 조타기를 잡은 채 중얼거렸다. "이게 왜 이러지, 계속 흐르네." 그 직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뱃머리가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아갔고, 배는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었다. 조준기는 이후 승객을 버리고 배에서 도주했지만, 이 혼잣말은 진짜였을 가능성도 있다. 선조위가 2017년 3월 세월호를 인양한 뒤 조사해보니 '유압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장 나 있었다. 이 부품이 제 역할을 못하면 배는 조타기를 꺾은 것보다 더 급격히 돌아간다.
화물을 대충 고정한 탓에 사고 당시 한쪽으로 쏠린 것도 배의 침몰 속도를 높였다. 선조위 의뢰를 받은 영국의 조사 기관 브룩스벨은 세월호 선내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긴 화물의 위치와 고박 상태 등을 분석해 1층 컨테이너 뒤에 놓여 있던 대형 건조기, 트레일러, 철근 묶음 등이 배가 기울 때 가장 먼저 한쪽으로 쏠렸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월호처럼 큰 배는 전복돼도 오래 떠 있을 수 있다던데.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큰 배는 선내로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해도 부력을 유지한다. 특히, 배의 바닥 층에는 기관실, 발전기실 등 주요 시설이 격실(사방을 격벽으로 둘러쳐 물이 안 들어오도록 한 방) 구조로 돼 있다. 한 격실이 침수돼도 다른 격실로 퍼지지 않으면 급격히 가라앉지 않는다. 문제는 세월호가 각 격실을 차단하는 수밀문(침수 때 내부 공간을 격리하는 문)을 열어두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는 아파트 방화문을 열어둔 것처럼 비상시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2층 화물칸 통풍구를 통해 밀려든 바닷물은 삽시간에 배 안에 퍼졌다. 이 탓에 세월호는 기운 지 101분 만에 침몰했다. 만약, 수밀문이 닫혀있었다면 배가 훨씬 오래 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잠수함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설도 있었는데.
배가 워낙 급속히 가라앉았고 선체를 당장 볼 수 없는 상황이니 여러 추측이 쏟아졌다. 잠수함 침몰설도 그중 하나다.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 레이더 영상에 주황색 미상의 물체가 잡혔다는 점이 근거가 됐다. 그러나 2017년 세월호를 인양한 뒤 본체를 조사해 보니 배를 급선회시킬 정도의 구멍(파공) 등은 없었다.
-'움직이지 말고 선내 대기하라'는 안내방송은 왜 나오게 됐나.
첫 안내방송은 배가 기운 직후인 8시 52분 나왔다. 여객부 선원 강혜성의 음성이었다. 그는 승객을 안정시키려고 방송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곧이어 선장 이준석도 같은 지시를 했다. 2등 항해사 김영호를 통해 "승객들에게 구명조끼 입고 선내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라"고 전한 것이다. 이는 다시 강혜성에게 전달됐고, "대기하라"는 방송은 침몰 때까지 15번이나 반복됐다.
하지만 선원들은 선내에 대기했다가는 익사할 수 있다고 판단해 승객을 남겨두고 도주한다. 이준석도 오전 9시 45분쯤 팬티 바람으로 해경정에 올라탄다. 일부 선원들은 재판에서 "이준석은 퇴선 명령을 내렸다가 혹시라도 승객이 죽는 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져야 할 것 같아 해경이 올 때까지 명령을 미룬 것"이라고 증언했다.
-해경 지휘부는 어떤 판단을 내렸나.
해경은 배가 침몰하던 때 무능과 오판으로 승객들을 살릴 기회를 수차례 놓쳤다.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이 세월호에 가까이 도착한 123정에 처음 내린 지시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우지 말고, 안전하게 인근 섬으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수백 명의 승객이 해경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123정은 승객들이 갇혀 있던 배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눈에 보이는 조난자 위주로 구조정에 태웠다.
현장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한 해경 간부들의 지시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서해해경청장 김수현은 배가 거의 침몰한 오전 10시 27분쯤 "침수가 안 되고 배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한다. 이에 최상환 해경 본청 차장이 "그럴 방법이 없다"고 지적하며 "우리 헬기 구조사 중에 일단은 거기 내려가 문을 열어줘야 된다. (승객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김수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경청장 김석균은 오전 9시 28분쯤 위기 관리 회의실에 도착한다. 그리고 6분 뒤 첫 지시를 내린다.
서해청장이 (구조 작업을) 지휘하기 바람.
회의실을 지키던 김석균은 구체적 지시 없이 오전 10시 29분쯤 현장으로 가기 위해 본청을 나선다. 세월호가 이미 침몰한 때였다.
-유족들이 원하는 건 '보상금'인가.
유족들은 "우리가 겪은 비극을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304명의 희생이 지난 10년간 정치적 갈등의 소재가 됐다는 점을 안타까워한다. 유족들은 세월호·이태원 참사 같은 중대 재난이 터졌을 때 신속히 사고 원인 등을 알아볼 수 있게 상설조사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생명안전기본법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재난학자인 스콧 게이브리얼 놀스 카이스트 교수는 최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가 힌트가 될 수 있다"면서 "정치인이 아닌 과학자 등 전문가가 위원회를 이끌며 조사하는 데다 위원들 임기도 대통령보다 길어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그날의 책임자들, 저울은 공정했을까> 인터랙티브 콘텐츠 보기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sew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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