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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공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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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쓰는 것에는 '공중’(公衆)이 붙는다. 공중은 사회의 일반적인 사람들을 뜻한다. 동전 두 개를 들고 줄 서서 기다리던 공중전화, 주말이면 세면도구를 한 보따리 싸 들고 나서던 공중목욕탕 등이 그렇다. 당시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던 보편적 시설이었는데 공중화장실 정도가 남아 있을 뿐,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 가는 말로 남았다.
공중은 일반인, 민중 등과 비슷하게 쓰이지만, 행정학에서 공중은 ‘정책을 결정하는 데 고려 대상이 되는 다수의 사람’을 이른다. 영속적 집단이 아닐뿐더러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지만, 특정한 공공 문제에 관심을 표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집합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공중은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시공간에 일시적으로 모인 ‘군중’과 다르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중보다 ‘대중’이 더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대중의 사전적 의미는 '많은 사람의 무리'다. 그러나 대중이 형성하는 문화, 곧 대중문화를 이룩해 내기도 하고, 무언가에 대중성을 부여하기도 하니 꽤 영향력 있는 말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서로 간에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주로 사회적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존재라는 면에서 '모여 있지만 흩어진 모래알'로 폄하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공공’(公共)에 주목한다. 공공이란 국가나 사회의 구성원에게 두루 관계되는 것이다. 또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을 공공성이라 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이것을 누군가가 사적으로 점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편, 언론 등과 같이, 공공의 대상은 여럿의 것인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다. 식당, 버스터미널, 지하철, 관공서 등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강조하는 것도, 공공 기관, 공공 도서관 등이 공공의 이익과 복지에 기여할 때 적절하다고 느끼는 것도 우리 사회가 이미 공공을 아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공공의 정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공문서는 공공언어로 쓴다. 정부나 공공 기관이 소통을 위해 쓰는 언어는 공공성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의 현수막이나 간판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용 설명서, 교양서적의 언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강의 언어도 그 범위에 속한다. 법적 효력을 갖는 계약서, 약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긴 세계사에서 인권의 개념이 생긴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지만, 모든 이가 공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많은 이들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많은 학생들이 웅변 학원에 다녔다. 준비된 원고를 외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칩니다!"라던 흔한 한 줄도 기억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주위에서 웅변 학원이 없어졌다. 오히려 논리적 연설이나 설득적 발표가 주목받고 있다. 조리 있게, 막힘이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지금도 중요한 덕목인데, 왜 웅변 소리가 사라졌을까? 그 까닭은 말하기의 방식도 공공성을 띠게 된 데 있다. 벽을 뚫을 기세로 소리 높여 혼자 말하는 것이 곧 여럿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당당하게 진술하는 유일한 소통법이 아니다. 감성적 웅변에서 논리적 연설로 넘어간 흐름처럼, 한국 사회 구성원의 눈은 이미 공중을 넘어 공공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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