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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무기 삼아 전쟁 치른 의정,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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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필수의료 공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대 정원 확대를 본격 추진한 건 지난해 1월. 이후 의사단체와 의료현안협의체를 꾸려 적정 증원 규모를 논의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의료계 반발에 망설이던 정부는 지난해 11월에서야 의대 정원 확대 수요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 40개 의대 2025학년도 증원 희망 인원은 2,000명을 넘었다.
예상을 넘는 수치에 의사단체는 거세게 반발했지만 의사 부족에 신음하던 국민은 정부를 지지했다. 여론을 등에 업은 정부는 올해 2월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못 박았다. 의료계에 사실상 전쟁을 선포한 셈이었다. 상대가 강할수록 내부는 단결한다. 의정갈등으로 고꾸라지던 대통령 지지율은 하락세를 멈췄고,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의혹 논란도 사그라졌다. 총선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정부의 엄포에 의료계는 의대생부터 의사까지 일사불란하게 결집했다. 일선 전공의는 총대를 메고 집단 사직서를 던지고 병원을 뛰쳐나갔다. 의대생은 학교를 박차고 나갔고 의사는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 “정부의 전공의 복귀 종용은 폭력이다” “아들이 일진에게 엄청 맞고 왔는데 어미ㆍ아비가 나서서 일진 부모 만나서 담판 지어야 한다”며 전투 사기를 북돋웠다.
총선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오자 의사단체는 감춰두었던 회심의 무기를 꺼냈다. 의사단체장으로 선출된 이가 나서 “대한의사협회(의협) 손에 국회 20~30석 당락이 결정된다” “의사에 나쁜 프레임을 씌우는 정치인들은 진료실에서 낙선 운동을 하겠다”며 정부를 겁박했다.
총선을 겨냥한 '의사 표' 전략은 먹혔다. 의정갈등으로 의료공백이 장기화하면서 부정적 기류가 흐르자 강경 일변도였던 정부가 태도를 바꿨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의료계 설득을 위한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효과가 없자 전공의 대표만 만나는 유화책도 시도했다. 실탄 없는 총성만 울렸다. 대안 없는 정부와 분열하는 의료계는 서로의 민낯만 확인했다. 총선 열흘 전이었다.
의정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물웅덩이에 빠진 생후 33개월 된 아이는 인근 응급의료기관을 찾지 못해 절망하다 신고한 지 3시간여 만에 숨졌다. 골절상을 당한 70대 여성도 이틀간 치료받을 마땅한 병원을 찾지 못하고 사망했다. 서울 대형병원에서만 치료가 가능한 희소난치 질환, 말기 암 등 중증질환 환자들은 기약 없이 미뤄진 진료에 목숨을 걸었다. 의사가 없어 환자를 받지 못해 빚더미에 앉은 대형병원들은 환자를 지키던 병원 노동자마저 쫓아냈다.
이제 총선은 끝났다. 반전은 없었다. 여당은 총선에서 총 108석에 그치며 참패했다. 의석수로 심판하겠다던 의료계도 정작 여당의 참패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하다. 정부와 의료계가 총선을 무기 삼아 치른 전쟁에서 승자는 없다. 전쟁은 다시 원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이번에는 오롯이 실력으로 승부를 내야 한다. ‘의대 2,000명 증원’에 매몰되지 않고, 필수ㆍ지역 의료를 살릴 수 있는 묘안을 내는 이가 진정한 승자다. 단, 이 승부의 전제는 애꿎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정부와 의료계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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