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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박단과 하청노동자 유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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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의 10년을 기록한 책 ‘520번의 금요일’엔 세월호 유족들이 대통령을 만나 억울함을 풀어보려는 시도가 무참하게 뭉개지는 과정이 나온다. “대통령이 나오라”는 절규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465리터의 캡사이신 최루액과 물대포로 답했다. 삭발과 단식 시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기대를 저버렸다. 세월호 침몰 원인을 끝까지 밝혀 달라며 한겨울 청와대 앞에서 40일간 노숙한 유족들을 만나러 나오지 않았다.
두 전직 대통령은 그게 대통령의 힘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힘 있는 사람이 억울한 사람을 만나주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는 걸 힘의 정점에 있었던 두 사람이 몰랐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은 유족을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게 통치행위다. 대통령은 누구를 만나고 만나지 않는가로 많은 것을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났다. 박 위원장 한 명을 따로 불러 140분이나 대화했다. 파격이었다. 대국민담화에서 “전공의들이 불법 집단행동을 한다”고 호통친 지 사흘 만에 윤 대통령이 만남을 청했다. 원래 노동자들에게 유연한 대통령이었나. 늘 그렇진 않았다. 윤 대통령은 같은 대국민담화에서 헌법상 권리에 의거한 2022년 화물연대 총파업을 대화가 아닌 힘으로 중단시킨 것을 자찬했다.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은 전공의라는 노동자 집단을 특별대우했다.
전공의 집단행동에 반응하는 한국사회의 태도 역시 특별나다. 버스기사와 청소노동자의 파업에 분개하던 자칭 선량한 시민들이 이번엔 대체로 조용하다. 병원들은 하루 수십억 원의 손실을 토로하지만 노동자 단체행동을 무력화시키는 수단인 손해배상 청구 폭탄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다. 정부는 “열린 자세로 전공의들의 의견을 경청하겠다”고 한다.
의사들의 위력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 직종의 대체 불가능함에서 나온다. 국가가 독점적 의료행위 권한을 의사들에게만 준 결과다. 누가 의사가 되나. 거칠게 말하면, 잘사는 집에서 태어난 덕에 국영수를 잘한 사람들이다. 올해 전국 의대 33곳의 정시합격자 중 서울 강남 3구 출신은 32.8%, 수능을 2번 친 재수생은 79.2%, 3번 이상 친 장수생은 39.7%이다. 집값과 교육비를 아낌없이 댈 부모의 경제력이 의대에 가는 지름길이란 얘기다. “가난을 겪는 학생들의 삶에서 공부나 성장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의 문장은 국영수를 잘하려는 노력마저 계급적 특권임을 가리킨다.
대통령이 사회적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는 건 좋은 일이다. 동료 시민들의 부당한 노동자 힐난도, 징벌적 손배 폭탄도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다. 그러나 싸우는 노동자 대우가 왜 공평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는지는 따져 봐야 한다. 조선소 하청노동자 유최안을 기억하는가. 하청 처우를 개선하라며 2022년 파업한 그는 대통령을 만나 호소할 기회를 감히 얻지 못해 가로·세로·높이 1m 크기의 철제구조물에 들어가 출입구를 스스로 용접해 막고 31일을 버텨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박단들의 목소리만큼 유최안들의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들리는 나라를 위해 오늘 투표를 잘하겠다는 말로 글을 맺고 싶지만 어느 정당을 둘러봐도 암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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