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의 10년]
<3> 서류를 찢다
평범한 아빠 장훈의 과학자가 되겠다는 결심
장훈은 회의 안건이 적힌 종이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전 회의장 안 사람들을 훑어봤다. 공학자, 변호사, 교수… 장훈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 왜 죽었는지 밝혀 주겠다며 모인 이들이다. 엉클어진 감정을 추스르며 전문가들을 향해 말했다.
"권위 있는 분들께 딴죽 걸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원칙에 어긋나는 결정을 해서는 안 되잖습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의 머릿속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4년 전 그날로 향하고 있었다.
장훈은 수완 좋은 과일 도매상이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날도 밀려든 배달 주문 탓에 새벽부터 바빴다. 오전 10시가 좀 넘었을까. 한숨 돌리며 시장 안 TV 화면을 올려봤다. 거대한 배 한 척이 검푸른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장훈의 인생이 산산조각 난 순간이다. 수학여행 간다며 전날 집을 나선 아들 준형이가 탄 그 배였기 때문이다. 그는 2주가 지나서야 뭍으로 돌아온 자식의 시신을 끌어안고 물었다.
'내 새끼는 왜 죽었나.'
장훈은 이후 그 답을 알아내는 데만 몰두했다. 10년간 이어진 거친 분투의 시작이었다.
'배는 왜 침몰했나?' 불신이 피워 낸 음모론
장훈은 음모론자였다. 침몰 원인을 쫓던 초기에는 분명 그랬다. 참사 유족 모임의 진상규명분과장을 맡았던 영향이 컸다. 온갖 제보를 받는 자리였다. "어처구니없이 300명 넘게 죽었는데 배후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 여러 시나리오로 변주돼 그의 귀에 들렸다. 누군가는 '박근혜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타고 침몰하는 배를 지켜봤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정부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찜찜함은 지울 수 없었어요. 침몰 원인도 불분명했고…무엇보다 대형 참사가 벌어졌는데 대통령이 한나절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들통난 거짓말은 불신을 키웠다. 사고 이튿날 제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실종자 가족이 머물던 체육관에 찾아왔다. 해양경찰청장 김석균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현재 잠수사 500여 명이 투입됐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구조선이 오가는 항구를 지키던 가족들은 10명이 채 안 되는 잠수사(①)를 목격했을 뿐이다.
정부의 강경한 움직임도 음모론적 상상을 부추겼다. 아이들 1주기에 맞춰 열린 추모 집회 때는 경찰이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유족에게 쏘아댔다. 수상해 보이는 이들(②)이 수시로 유족 곁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사건 전말을 알아내기 위해 2015년 꾸려진 특별조사위원회를 정부가 느닷없이 강제해산(③)시키자, ‘밝혀져선 안 되는 뭔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믿음이 무너진 자리에는 반드시 음모론이 피어오른다. 2014년 터진 한국 여객선 참사를 10년간 추적해온 미국의 재난학자 스콧 게이브리얼 놀스. 경험 많은 그는 세계 곳곳의 참사 현장에서 음모론이 퍼지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재난 조사가 지연되면 사람들은 정부가 무능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서 사고 원인 등을 두고 각자의 가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음모론이죠. 불행히도 이번 참사도 이 과정을 밟았어요."
결정적 증거 '선체' 1,073일 만에 뭍으로
2017년 3월,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의 몸뚱어리 같은 대형 여객선이 와이어에 묶여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들이 탔던 배다. 1,073일 만에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참사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전임자가 탄핵되고,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 판이 막 열리던 때였다. 인근 섬에서 망원 렌즈로 인양 작업을 지켜보던 장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녹슨 선체에 사고 당시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희망이 생긴 건 분명했다.
‘저 배를 해부해 보면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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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선체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내로라하는 선박·해양 전문가 8명이 위원으로 임명됐다. 여당과 야당, 유가족 모임이 각각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지원할 조사관 등 40여 명도 채용돼 위용을 갖췄다. 조사위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년. 하지만 명망 있는 전문가들이라면 충분히 답을 내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의 시간’에 정치만 끼어들지 않는다면 분명 그렇게 보였다.
조사위의 핵심 임무는 침몰 원인을 밝혀내는 일이었다. 앞서 박근혜 정부의 검경합동수사본부와 해양수산부는 선사의 돈 욕심 탓에 배가 침몰했다고 결론 내렸다. 승객을 더 태우려고 낡은 배를 개조했고 화물도 과적했는데, 이를 대충 묶어 배가 기우뚱했을 때 짐이 한쪽으로 쏠려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배가 어디에 부딪혀 침몰한 게 아니라 내부 문제 탓에 전복됐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내인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침몰한 배를 직접 보지 못한 채 내린 판단이었다. 장훈이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이유다.
"불법 증개축, 과적, 고박 불량… 우리 아이들이 죽은 이유라고 하기엔 너무 하찮아 보였어요. 가슴에 와닿지 않았죠."
장훈과 유족들은 전문가들이 선체를 직접 조사해보면 전혀 다른 결론에 다다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조사를 할수록 기존 결론에 무게가 더 실렸다. 잠수함과 부딪혔다면 배 외관이 크게 찌그러졌어야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없었다. 특히 유압 솔레노이드 밸브(④)라는, 작지만 중요한 부품이 고장 났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선박 자체 결함설이 힘을 얻었다.
과학은 밀려나고, 알력만 남은 사고 조사
하지만 '외력설'은 질기게 살아남았다. 여객선이 잠수함과 충돌하는 등 외부에서 가해진 힘 탓에 배가 가라앉았다는 주장이다. 특히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핀 안정기가 정상 범위보다 크게 돌아간 게 확인되자 "외력설을 조사할 태스크포스를 꾸려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2018년 7월 2일. 장훈은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바헤닝언의 한 실험장에서 바다처럼 꾸며진 대형 수조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아들이 탔던 여객선을 25분의 1 크기로 줄여 만든 모형 배가 내달렸다. 그러다 누군가 선체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면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졌다. 얼마나 강한 힘이 작용해야 침몰 여객선과 동일한 궤적을 그리며 전복되는지 알아보는 '외력설 실험'이었다. 100번 이상 넘어졌을 때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외국인이 입을 뗐다. 네덜란드 해양사고 조사업체 '마린'의 직원 헹크 반덴붐이었다.
"왜 자꾸 배를 넘어뜨리려는 겁니까? 외부에서 얼마나 센 힘이 작용하든지 간에 정상적인 배라면 쓰러지지 않아야 해요. 기울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겠죠."
마린은 설립된 지 80년 넘은 회사였다. 조사위 의뢰를 받아 정확한 사고 경위를 알아내는 데 관심 있을 뿐 정치적 배경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마린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잠수함과 충돌해 배가 침몰했다는 가설은 근거가 없다.’
외력설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조사위 내부 공기가 달라졌다. 내인설에 더욱 무게가 실리자 이를 지지하는 위원과 조사관들이 더 큰 저항에 부딪히는 역설에 빠졌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결론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내인설로 결론 내린 이들을 ‘적폐 정권'의 옹호자처럼 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일이 커졌다.
두 쪽 난 보고서, 절망을 더하다
2018년 7월 20일. 장훈이 종이를 찢은 스물여섯 번째 회의 날이었다. ‘배가 외부 충격 탓에 전복됐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던 한 위원이 들고 나타난 보고서가 발단이 됐다. 그는 조사관들이 1년 가까이 조사해 만든 300쪽짜리 보고서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정리한 열 쪽도 안 되는 프레젠테이션용 문서로 갈음하자고 제안했다. 두툼한 보고서에는 내인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를 별첨 문서로 미뤄두자는 게 이 위원의 의견이었다.
장훈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그는 내인설과 외력설 중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위원이라도 선박 전문가들이 그 많은 날 연구한 결과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배가 침몰하기 전 급선회한 이유 등을 설명한 핵심적 내용이 보고서에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 위원회 활동 종료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과학적 결론을 듣고 싶었던 장훈의 기대는 그날 완전히 깨졌다.
침몰 원인을 결론 내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부담감에 짓눌렸는지 역할을 포기한 위원도 있었다. 항해학과 조선공학 전문가인 공길영은 서른한 번의 전원회의 중 열한 번만 참석한 뒤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8명의 위원 중 조선공학자 이동곤은 '중요한 시험 결과를 의도적으로 감췄다'는 오해(⑤)를 받고 위원회에서 사실상 쫓겨난 상태였다. 위원장인 김창준은 속이 탔다. 침몰 원인을 결론 내려면 곧 표결해야 하는데 남은 위원이 6명뿐이었다. 그중 3명은 내인설이 맞다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외력 가능성을 더 조사해야 한다고 맞섰다. 표결에서 자칫 동수가 나와 결론을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김창준은 당시를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공길영 위원이 사는 부산까지 찾아가 ‘제발 마지막 회의만이라도 나와 표결해달라’고 했죠. 그래야 명확히 결론이 나서 더 이상의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봤어요. 그런데…”
3대 3. 2018년 7월 31일 진행한 최종 표결에서 우려했던 결과가 나왔다. '내인설안'과 ‘열린안'에 각각 3명의 위원이 서명했다. 열린안은 외부 요인에 의한 침몰 가능성을 더 조사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공길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조사위는 1년간 진실에 바짝 접근했다. 화물칸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을 복원해 불과 1분 만에 배가 45도나 급격히 기울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선원이든, 해경이든 승객들에게 즉각적으로 "배에서 탈출하라"고 알렸어야 했다는 얘기다. 또 바닷물 유입을 막는 수밀문이 열려 있었다는 점이나 핵심 부품이 고장 난 것도 조사위 덕에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작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두 권의 보고서를 작성해 유족들에게 던졌다. 장훈과 유족들은 전문가들의 알력 다툼을 여과 없이 본 터라 보고서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선체조사위 활동이 끝난 뒤 참사 원인을 조사하는 공적 위원회가 한 차례 더 만들어졌지만, 여기에서도 결론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공식 합의한 침몰 원인은 아직도 없다. 아이들이 탄 배가 왜 침몰했는지 명확히 듣지 못한 부모들은 답답했다. 하지만 그들을 더 구석으로 내몬 것은 '조사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생떼 부리라'는 모진 소리였다.
물리학자들과의 만남 그 후, '진짜' 책임을 묻다
“아는 물리학자 좀 소개해 주세요.”
카이스트 교수 전치형은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과학기술학자인 그는 선체조사위 의뢰로 종합보고서를 썼다. 장훈은 조사위 마지막 회의 날 전치형에게 과학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스스로 '세월호의 과학'을 이해해보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유족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과학자의 임무라고 여겼던 전치형은 동료들을 모았다. 6개월 뒤, 장훈과 5명의 과학자가 모여 벌인 8시간의 수업이 성사됐다.
장훈은 열변을 토했다. 내인설에 힘을 실어준 실험 데이터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는 여전히 배가 자체 결함 탓에 침몰했다는 설명을 믿지 못했다. "보고서대로라면 뱃머리 방향이 바뀌는 속도가 초당 2도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고 당시 배의 궤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폈다.
진지하게 듣던 물리학자 중 한 명이 되물었다.
“실험 결과를 보면 뱃머리가 방향을 트는 속도와 무관하게 배는 넘어가는 것 아니었나요?"
“그렇죠.”
“그럼 속도는 안 중요한 거잖아요? 애초 넘어질 준비가 돼 있던 위험한 배라는 얘기니까요."
장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네덜란드인 헹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다른 학자가 말을 보탰다.
"중요한 건 사고 당시와 동일한 상황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침몰 원인을 찾는 거잖아요."
허망했다. 숫자 0.1과 0.01의 차이를 붙들고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왜 이 결론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을까. 거대한 악당이 꾸민 음모 탓에 아이들이 희생됐다고 생각해야 마음의 도피처가 생겨서는 아닐까.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평범한 얼굴을 한 공범들이 조금씩 잘못을 쌓아 올리다 한순간에 무너져 발생한 사건이었다. 장훈은 이후 배가 왜 침몰했는지 더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배'를 누가 출항하도록 허락했는지, 세월호에 하루밖에 타지 않은 선원 전영준은 죗값을 치렀는데 해경청장 김석균은 왜 무죄를 받았는지 같은 질문이다.
"배가 기울고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101분이 있었어요. 그때 구조했다면 참사가 아니라 사고에 그쳤겠죠. 정부는 최선을 다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구조하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장훈은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물었다. '내가 바라는 건 과연 뭔가' 하는 질문이다. 가족이 겪은 비극을 다른 이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그건 법과 사회 구조를 바꿔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제 이 방법을 찾기 위해 살고 있다.
"아들은 돌아올 수 없지만" 연구소장이 된 아빠
8평 남짓한 일산의 한 사무실. 각종 연구 보고서와 서적이 꽂힌 책장에 앳된 소년의 사진과 학생증이 놓여 있다. 이곳은 장훈이 2년 전 뜻 맞는 사람들과 차린 '4·16안전사회연구소'다. 방재관리사 자격증까지 딴 그의 시선은 세월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해양 안전, 산업 재해 등 더 넓은 재난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안전의 경제학을 연구하고 싶어요."
승객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청해진해운처럼 안전 관리를 안 하는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알리고, 또 그렇게 세상이 변해가도록 하는 게 신생 연구소의 중요한 목표다.
장훈은 공들여 책도 한 권 썼다. 아들의 입장에서 사고 당일을 재구성하고 자신이 지켜본 10년간의 역사를 정리했다. 자식이 죽은 날부터 되짚어보는 일은 지옥 같았지만 정사(正史)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이는 해경청장 김석균과 다투는 일이기도 했다. 장훈과 김석균은 비슷한 때 책을 냈다. 한쪽은 골든타임(승객을 구조할 수 있는 시간)을 날린 해경의 무능을 이야기했고, 다른 쪽은 해경이 최선을 다해도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지난한 싸움이 될지 모르지만 포기는 없다. 세상은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변해간다는 것을 10년간 느꼈다. 연안 여객선 선장들이 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참사 이후 강화된 항해 안전 기준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자발적으로 더 높은 기준을 고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열심히 알리다 보니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변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세월호 참사 후 지난 10년은 최초의 역사였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어 참사 조사를 체계적으로 진행한 경험은 3년 뒤 포항 지진 대응의 자양분이 됐고, 불의의 사고로 숨진 학생이 더는 제적되지 않고 명예졸업할 수 있는 제도도 만들어졌다. 참사 피해자들이 소리 질러 힘겹게 이뤄낸 성과들이다.
장훈이 기자에게 물었다. 유족들이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냐고. 글쎄,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일까. 말을 고르는 사이 답이 돌아왔다.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거예요."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뭘 해도 그런 일은 생길 수 없죠. 그런데도 돈도 안 되는 연구소를 왜 하냐. 나 같은 불행한 유족이 다시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10년 전 떠난 준형이도 그걸 바랄 겁니다."<끝>
'산 자들의 10년' 내러티브 기사는 3편으로 완결됐습니다. 성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편에서는 지금껏 진행한 조사와 수사 내용 등을 바탕으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논쟁들을 짚어봅니다. 또 전문가들과 함께 대표적 다중이용시설인 여객선과 지하철의 안전이 지난 10년 사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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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년
서류를 찢다
다시 쓰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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