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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성씨 못 따른다" 거부하자 파혼…일본 '선택적 부부 별성'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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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이름으로 홍수빈 괜찮지 않나?", "백수빈이 아니라 홍수빈인가요?"
최근 방영 중인 tvN 인기 드라마 '눈물의 여왕' 1회에 나온 '가족 성씨(姓氏)'에 대한 에피소드다. 대기업 퀸즈그룹의 재벌 3세 여성 홍해인과 결혼한 보통 남성 백현우가 미래에 태어날 손녀는 아빠가 아닌 재벌가인 엄마의 성을 잇게 하겠다는 장인어른의 말에 씁쓸해하는 장면이다.
한국 같으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부부 성씨 문제 같지만, 일본 현실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성씨 문제는 미래를 약속한 남녀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갈등의 씨앗이 될 때가 많다. 일본이 세계에서 찾기 힘든 '부부 동성(同姓)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서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는 순간 한쪽이 자신의 성씨를 포기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부부가 같은 성을 쓸지, 각자 자신의 성을 유지할지 고르는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를 도입하자는 요구가 나오지만 보수적인 일본 사회의 벽을 아직 넘지는 못하고 있다.
일본 기후현 출신 30대 여성 나카시마 레이(가명)는 성씨 문제로 4년 전 파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당시 남자친구와 결혼을 약속하면서 '부모님이 기후현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유지'라는 비밀을 털어놨다. 하지만 장녀로서 부모님 사업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성을 바꿀 수 없어 남자친구에게 "성을 바꾸면 안 되느냐"고 부탁했다. 남자친구는 성을바꾸겠다고 약속했고 부모님도 어렵게 설득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남자친구 아버지는 "'왜 아들 성을 버리냐'는 이야기가 너무 나오니 힘들다. 며느리가 성을 바꿨으면 한다"는 말을 꺼냈고, 이 한마디에 두 사람의 결혼은 없던 일이 됐다. 그랬던 나카시마는 지난해 결혼을 위해 남편의 성으로 바꿨다. 그는 "또 성이 문제가 될까 봐 지금 남편한테는 차마 바꿔 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나카시마처럼 결혼과 동시에 성을 바꿔야 하는 이유는 민법 750조 때문이다. 혼인신고를 하는 순간 부부는 법적으로 같은 성을 써야만 한다. 결혼 상대가 외국인이거나, 이혼 혹은 사별하지 않는 한 성을 바꿀 수 없다. 부부가 같은 성을 쓰면 되는 제도라 남편이 아내 성을 따라가도 괜찮다.
그러나 남편 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탓에 남자가 성을 바꾸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2022년 혼인한 부부 50만4,930명 중 남편의 성을 따른 아내는 94.7%(47만8,199명)였다.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사회에서는 '성은 여자가 바꾸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남편에게 성을 바꾸라고 권하는 순간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도쿄에 거주하는 20대 직장인 요시무라 지에(가명)는 "내 성을 지키고 싶어 남편에게 '네가 바꿔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됐다"며 "결혼 전 시아버지에게 '이렇게 제멋대로인 아이였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성씨를 바꾸면 한동안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신분증, 휴대폰, 통장 등 서류상 기재된 성을 모두 바꾸러 다녀야 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일로 창구에서 몇 시간을 대기하는 번거로운 일은 여자의 몫이 되고 만다. 요시무라는 결혼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아직 통장 이름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려면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데 일하고 가정을 돌보면서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다"며 "왜 여자만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성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혼 가정의 자녀가 대표적이다. 결혼 당시 아내가 성을 바꿨다면 이혼 후에는 자신이 옛날에 썼던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엄마가 아이 양육을 맡게 되면 자녀는 엄마의 성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혼 가정'이란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
부부 동성 제도가 남녀평등 가치와 동떨어지는 제도인 데다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대안으로 나온 것이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다. 부부가 같은 성을 쓸지, 다른 성을 쓸지 개인의 선택에 맡기자는 것이다.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도입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1991년 공식화했다. 일본 법무성 산하 자문기관인 법제심의회는 이때부터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검토한 지 5년이 지난 1996년이 돼서야 '부부 동성 제도를 폐지하도록 민법을 개정하자'는 공식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일본 정부도 법제심의회 제안에 따라 법안 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보수적 성향이 강한 일본 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수 정당이자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한 자민당의 반대로 정부는 법안 준비만 한 채 국회 발의조차 하지 못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자민당과 보수 진영은 선택적 부부 별성은 전통적인 가족 제도의 붕괴로 이어지거나, (가족이 동일한 성을 쓰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최근 들어 일본 사회에서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본의 대표적 경제단체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지난 1월 17일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의 조기 도입을 공개적으로 찬성하기도 했다. 게이단렌이 정부에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실현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제 측면에서 부부 동성 제도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제도로 인식되고 있다. 자신의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에서는 결혼 전에 쓰던 옛 성을 유지하는 여성이 늘고 있는데 옛 성을 계속 쓰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업직 여성의 경우 결혼을 이유로 성을 바꾸면 거래처에 일일이 설명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거래처가 글로벌 기업이라면 성이 바뀐 탓에 담당자를 갑자기 교체한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게이단렌은 정부에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를 요청한 이유에 대해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여성에게 (부부 동성 제도는) 경력 형성의 저해 요인이 된다"며 "연구원은 성을 바꾸기 전 쓴 논문 실적이 인식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게이단렌이 2020년 회원 기업 273곳을 대상으로 '여성의 활약을 돕기 위해 재검토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보는 사회 제도'를 조사한 결과, 46곳은 '부부 동성 제도'를 꼽았다.
지난달 19일에는 일본 가가와현 의회와 현내 17개 기초자치단체 의회 모두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로 했다. 일본 47개 도도부현(한국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 중 지방자치단체 의회 전체가 의견서 제출을 채택한 것은 가가와현이 처음이다.
가가와현에서 의견서 채택 운동을 벌인 '소곤소곤 말하는 모임(보소보소카타루카이)' 대표 야마시타 노리코(51)는 "부부 동성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낸 지방의회가 나왔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며 "선택적 부부 별성 제도 도입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서 '덕분에 더 열심히 뛰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 운동이 더 확산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 연구 결과도 나왔다. 요시다 히로시 도호쿠대 경제사회노화연구센터 교수는 지난 1일 부부 동성 제도가 유지될 경우 2531년에는 모든 일본 국민의 성이 '사토'로 통일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토는 일본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요시다 교수는 "지난해 사토 성은 0.83% 증가했는데, 부부 동성 제도로 인해 사토 성으로 바꾸는 사람이 늘면 2446년에는 일본인의 50%가 사토가 되고, 2531년에는 100%가 된다"고 전망했다.
일본 사회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만큼 자신의 옛 성을 다시 쓸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여성도 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편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더 크다. 요시무라는 "혼인신고서를 낼 때 '이제 이 성을 쓸 수 없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 자신이 사회에서 버림받는 기분이었다"며 "옛 성을 당당하게 쓸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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