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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들의 행동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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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별세한 '행동경제학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의정 갈등, 특히 전공의 집단행동의 향배를 물었다면, 카너먼은 몇 번이고 답을 피하려다가(생전 그는 비관주의자로 비칠 만큼 판단에 신중했다고 한다.) 마지못한 듯 어떤 생물학자의 말을 빌려 답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영역을 점령한 동물이 경쟁자의 도전을 받으면 거의 항상 주인이 이긴다."(대표작 '생각에 관한 생각'에 인용된 발언이다.)
저 직관적 비유는 카너먼이 '평생의 단짝'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수립한 '전망 이론'으로 뒷받침된다. 해당 논문이 발표된 1979년을 '행동경제학 원년'으로 자리매김했고 심리학자인 두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트버스키 사후였던 2002년)을 안긴 이 이론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이 내리는 선택에 대한 설명력과 예측력을 높였다. 특히 수학적 확률과 기댓값을 앞세워 이런 도박적 의사결정의 설명을 독점했던 경제학 기대효용이론의 허점을 드러내 성가를 높였다.
저자들이 홍보차 다소 거창하게 이름을 지었다는 전망 이론은 (기대효용이론에는 없는) 세 가지 전제를 깔고 인간의 의사결정을 분석한다. 첫째는 준거점과의 비교. 객관적 효용 비교가 아니라 경험, 처지, 기대로 형성된 주관적 자기 기준에 견줘 선택지가 이익인지 손실인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둘째는 민감성 감소 원칙. 요컨대 900달러와 1,000달러의 차이는 100달러와 200달러의 차이보다 훨씬 작게 느낀다는 얘기다. 셋째는 손실 회피. 뒷면이 나오면 100달러를 잃고 앞면이 나오면 150달러를 따는 동전 던지기 도박은 기댓값의 관점에선 남는 장사이지만 실제 베팅하는 사람은 소수다. 손실은 이익보다 커 보이기 때문이다.
비유가 불편하다면 용서해주시길. '카너먼 월드'에서 전공의는 정부를 딜러로 마주한 겜블러다. 카지노 이름은 '의대 2,000명 증원'. 힘든 수련을 마치고 나면 높은 경제적 수익을 얻을 것으로 기대하던 예비 전문의 입장에선 파이를 나눌 경쟁자가 늘어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다. 이를 감수하고 증원 찬성에 베팅한다면 정부로부터 수가 인상, 수련환경 개선 등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전공의들은 집단사직으로 반대 베팅을 했다. 용케 증원 철회를 관철한다면 기대 수익을 그대로 누릴 수 있겠지만, 아니라면 의사면허를 잃고 줄어든 파이마저 맛보지 못할 터.
전망 이론에 비춰보면 훤히 전망 가능한 결과였다. 전공의들의 눈높이(준거점)를 감안했을 때, 이들이 느끼는 손실은 단순히 의사 증원에 따른 기대수익 감소분에 비할 게 아니다. 여기에 웬만한 이익을 포기할지언정 손해는 보기 싫다는 손실 회피 심리가 발동하면서 정부가 내놓은 보상책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저들이 처벌과 여론 악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료 현장을 이탈한 건 민감성 감소 원칙으로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다. 무조건 손실을 본다고 여기는 상황에선 조금이라도 판도를 바꿀 여지가 있다면 더 큰 손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하는 법이다.
카너먼은 손실과 이익이 이토록 비대칭적이라 기존 합의점을 변경하려는 재협상은 타협을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전망 이론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지만, 극한갈등으로 점철됐고 의사는 끝내 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의정 협상 역사를 정확히 통찰한다. 정부는 과연 전공의들 생각에 관해 얼마나 생각해보고 의대 증원에 나섰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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