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美·日 등 보조금 전쟁 속, 전문가들 "K반도체, 인재 확보도 놓치지 마라"

입력
2024.04.17 07:00
2면
구독

글로벌 반도체 社 임원 53%
"3년 동안 최우선 과제는 인력 확보"
노후 지원·해외 인재 유치 고민해야

2022년 5월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시찰 후 연설을 마친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5월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시찰 후 연설을 마친 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도체 산업의 최대 이슈는 인재 관련 리스크

'2024 글로벌 반도체 산업전망' 보고서


세계적 회계‧컨설팅 기업 KPMG와 세계반도체연맹(GSA)은 최근 글로벌 반도체 기업 고위 임원 172명에게 '앞으로 3년 동안 반도체 산업에서 최대 이슈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절반이 넘는(52%) 응답자가 인재 관련 리스크를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16일 이번 조사 결과를 담은 '2024 글로벌 반도체 산업전망' 보고서를 살펴보면 현재, 미래 가릴 것 없이 반도체 업계의 가장 큰 고민은 인재였다. '앞으로 3년 동안 자사의 최우선 전략 과제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가장 많은 대답 역시 '인력 유치, 양성, 유지'(53%·3개까지 응답 가능)였다. '앞으로 3년 동안 반도체 업계에 미칠 가장 큰 영향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응답자 56%가 '인력 확보 경쟁 심화'를 꼽았다.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력은 첫째도, 둘째도 사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이번 조사에는 반도체 제조기업(28%), 반도체 설계기업(26%), 공급 벤더(21%), 서비스‧시스템‧소프트웨어‧솔루션 제공기업(16%)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지역별 비중은 미국 46%, 유럽 24%, 아시아‧태평양 21%였다.




실제로 최근 미국에 대규모 시설 투자를 계획한 반도체 기업들은 하나같이 인력 양성에도 투자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 투자가 경쟁적으로 이뤄지더라도 미국 내 전문 인력 확보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대만큼의 생산성이 나오지 않을 거란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애리조나, 뉴멕시코, 오하이오, 오리건주에 1,000억 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한 인텔은 앞으로 10년 동안 1억 달러를 반도체 대학에 투입한다고 밝혔다. 대만 TSMC도 애리조나 공장과 가까운 애리조나주립대와 인력 채용부터 공동 연구개발(R&D)까지 협력을 추진한다. 삼성전자의 450억 달러 투자 내역에는 인력 육성 기금 4,000만 달러가 담겨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38억7,000만 달러를 들여 미국에 반도체 패키징 시설을 짓기로 했는데 투자처로 인디애나주를 낙점한 이유 중 하나가 반도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인근 퍼듀대의 인력 풀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한국 반도체 경쟁력은 단연코 '인재'

KPMG '2024 글로벌 반도체 산업전망' 보고서 캡처

KPMG '2024 글로벌 반도체 산업전망' 보고서 캡처


각국의 반도체 지원책이 머니 게임 양상으로 흐르지만 전문가들은 반도체 경쟁력이 인재 확보에 달렸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그동안 세계 시장을 주도했던 가장 큰 이유도 인재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는 "(미국 내) 인력과 반도체 생산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보조금만으로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망을 재건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전기컴퓨터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인텔, 스페이스X, 모건스탠리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스타트업을 차렸다. 박 대표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창업한 이유로 "반도체 설계 인력과 개발 환경"을 꼽았다. 이어 그는 "한국은 반도체 파운드리와 메모리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은 인력이 풍부하다"며 "미국이 반도체 전방시장(데이터센터 운영기업 등)에 대한 접근성이 좋다면 한국은 후방인 생산 인프라와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산업에 국가 보조금을 퍼붓고 있는 미국, 일본, 유럽, 중국과 한국의 사정이 다른 점도 감안해야 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 일본, 중국에서 보조금으로 짓거나 지을 예정인 반도체 제조 시설 상당수는 내수용 반도체를 만드는 곳"이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반도체 중 비중이 높은 건 수출용이다. 수출품에 보조금을 주면 보복 관세로 이어질 여지가 많다. 실제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으로 산업은행 등 채권단의 지원을 받았던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는 2000년대 중반 미국과 유렵연합(EU)으로부터 각각 44.29%, 34.8%의 상계관세를 맞았다.

그때와 상황이 달라져 보호무역주의가 심해졌다고 해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대만도 반도체 산업에 세액 공제 같은 간접 지원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와 대만은 무역 분쟁 소지가 적은 반도체 R&D를 국가가 집중 지원해 경쟁력을 키워왔다. 이 때문에 한정된 자원과 우리 여건을 감안하면 인재 확보에 더 많이 공을 들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의대 못지않았던 공대 인기 다시 살려야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6일 대전 유성구 ICC호텔에서 대한민국을 혁신하는 과학의 수도, 대전을 주제로 열린 열두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전충남공동취재단

윤석열 대통령이 2월 16일 대전 유성구 ICC호텔에서 대한민국을 혁신하는 과학의 수도, 대전을 주제로 열린 열두 번째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대전충남공동취재단


최근 일부 유치원이 '의대반'을 운영하는 등 의대 광풍이 불고 있지만 1980~90년대 우리나라 성적 최상위권 학생은 공대에 진학했다. 1990년 종로학원의 대입배치표에서 자연계 학과 합격자 성적 순위는 서울대 물리학, 컴퓨터공학, 의예, 전자공학, 미생물학 순이었다. 상위 20개 학과 중 서울대를 빼면 연세대 의예(12위), 딱 하나뿐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반도체 경쟁에서 우위에 서려면 청년 세대가 공학도를 꿈꾸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과 수재는 서울대 자연계 간다'는 공식이 깨진 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에서 비롯한 외환위기로 대기업 이공계 연구소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등 이공계 연구원은 직업 안정성이 높고 회사가 성장하면 샐러리맨의 신화도 될 수 있었는데 외환위기 후 근무 여건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반도체 개발자 연봉은 적지 않다"며 "이 분야 인재들의 불만은 정년이 보장되지 않고 은퇴 후 충분히 일하고 가르칠 능력이 있지만 (의사처럼) 마음에 드는 조건으로 활동할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관계자나 전문가들은 ①이공계 교수 급여 인상 ②반도체 인력의 노후 지원제도 ③해외 인력 취업 문턱을 낮추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국내에 일자리가 있는 게 중요하다"며 "대학에서 반도체 교수가 많이 필요한데 기술자들이 은퇴해도 봉급이 낮아 처우가 더 좋은 해외 대학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혁재 교수는 "반도체 인재가 노후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교원공제조합처럼 반도체 인력의 노후를 지원하는 공공 제도를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정부가 그럴 필요성을 국민께 설명하고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현 대표는 "대만, 미국은 비자 정책을 활용해 우수 인재를 유치한다"며 "이공계 석·박사나 반도체 인재가 보다 쉽게 비자를 받을 수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