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테러 음모론

입력
2024.03.26 17: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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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서울 중구 정동 주한러시아 대사관 앞에 추모의 꽃과 초가 놓여 있다. /뉴스1

서울 중구 정동 주한러시아 대사관 앞에 추모의 꽃과 초가 놓여 있다. /뉴스1

충격적인 사건 사고에는 늘 음모론이 따라붙는다. 지난 22일 벌어진 모스크바 인근 공연장 테러를 두고도 여러 음모론이 나오는데, 그 발단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속한 대처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쿠르스크 잠수함 침몰, 2004년 베슬란 학교 인질 사건, 지난해 바그너 그룹 반란 등 곤란한 일이 발생하면 늘 며칠간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엔 사건 직후 새벽 직접 긴급회의를 열고, 우크라이나가 테러범 도피를 도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음모론이 자라날 만한 상황은 이게 끝이 아니다. 테러 10일 전 같은 장소에서 공연을 열었던 프로듀서가 “당시에는 경비원 200명이 행사장을 지켰다”고 한 언급을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가 보도했다. 이는 이달 초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 테러 첩보를 공유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정작 테러 당일 범인들이 공연장 구석구석을 산책하듯 뒤지며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동안, 이들을 막기 위한 러시아 측 대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건 직후 ‘IS-호라산’은 “우리 대원이 했다”고 공표했다. IS는 아프가니스탄 국제공항 테러 등 끔찍한 자살 폭탄 공격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번엔 달랐다. 도주하다 체포돼 덜덜 떠는 모습이었고, “돈을 받고 가담했다”고 털어놓았다. 반면 IS는 “대원들이 수백 명을 죽이고 공연장을 파괴한 뒤 무사히 기지로 철수했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당국은 난처한 상황이다. 체포된 테러 용의자 모두 타지키스탄 국적자로 알려졌는데, 수사 결과에 따라 8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내 타지키스탄 이민자들 민심이 요동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이 테러 방지 실패 책임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 초기 ‘테러범 도주로 제공’ 언급 이후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직접 발언이 사라졌다. 섣부른 의혹을 제기하다가, 미국이 반박할 정보를 내놓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러시아는 체포된 용의자 중 한 명이 타지키스탄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관과 접촉했다는 조사 결과를 흘리고 있다. 음모론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을 것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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