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시스템이 온통 하얗던 시절

입력
2024.03.26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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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

2015년 영화 '알로하( Aloha)'에서 아시아계 혼혈 캐릭터를 연기, '화이트 워싱' 논란을 일으킨 영화 속 에마 스톤. Columbia Pictures 사진

2015년 영화 '알로하( Aloha)'에서 아시아계 혼혈 캐릭터를 연기, '화이트 워싱' 논란을 일으킨 영화 속 에마 스톤. Columbia Pictures 사진


직역하자면 흰 덧칠로 때를 지운다는 뜻인 '화이트 워싱(White Washing)’은 영화나 쇼 오락산업의 인종 차별을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 ‘블랙 페이스’ 즉 백인 배우가 흑인으로 분장해 스스로 웃음거리가 됨으로써 인종 편견을 모욕적으로 부각하는 것과 달리, 화이트 워싱은 소수인종 캐릭터를 백인이 도맡음으로써 미디어에 유색인종이 노출될 기회를 박탈하는 걸 가리킨다. 비백인의 비가시화는 그들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위상을 구조적으로 약화한다.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석연찮은 태도로 논란을 일으킨 미국 배우 에마 스톤이 2015년 영화 ‘알로하(Aloha)’에서 중국-하와이계 혼혈 공군 조종사 캐릭터(Allison Ng)를 연기한 것,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해리 포터’ 시리즈의 프리퀄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이 온통 백인의 서사였던 게 단적인 예다. 흑인 예술문화 부흥운동, 즉 할렘 르네상스가 본격화한 192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 후자의 화이트 워싱은 악의적이라 할 만하다.

화이트 워싱은 로큰롤 등 대중음악에서도 전개됐다. 흑인 뮤지션이 작곡하거나 부른 노래를 백인이 편곡·개사해 불러 큰 인기를 끌면서 정작 원곡자는 소외돼 돈도 명예도 얻지 못하고, 원곡에 담긴 흑인 정서와 문제의식까지 표백하는 사례들. 1955년 3월 26일 빌보드 팝차트 1위를 기록한 백인 가수 조지아 깁스(Georgia Gibbs)의 노래 ‘댄스 위드 미, 헨리(Dance With Me, Henry)’는 흑인 가수 에타 제임스의 ‘롤 위드 미, 헨리(Roll With Me, Henry)’를 재녹음한 곡이었다. ‘Roll’이 ‘Dance’로 바뀌는 등 일부 가사를 수정한 건 ‘roll’이 성행위를 연상시킨다는 시비 때문이었다. 라디오 등 방송 편성권을 백인이 독점하던 시대여서 제임스의 노래가 방송을 타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흑인 재즈 트롬보니스트 론 웨스트레이의 말처럼 대중문화 "시스템 전체가 온통 새하얗"던 시절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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