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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보도 하다 웃은 아나운서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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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부 주요 부처의 국외 이전을 밀어붙인 총리라든지 각종 사고를 막지 못한 관료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재난 앞에서 웃음을 터뜨린 앵커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이장욱 작가의 소설 ‘뜨거운 유월의 바다와 중독자들’에는 “재난 사고 소식을 전하다가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온 아나운서”인 ‘한나’가 등장합니다. 사실 그의 웃음은 발작이라고 할 무언가였으나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한나의 얼굴은 확실히 ‘웃음’이라고 할 만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시청자들의 거센 분노를 삽니다.
한나가 사과문을 발표한 이후로도 항의는 계속됩니다. 사과문에 쓴 “의도와 다르게”라는 표현이 “비겁한 회피”로 받아들여지면서 결국 그는 방송사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다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전의 ‘조용한 시간’으로는 쉽게 돌아갈 수 없도록 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한나를 죽음으로 몰아붙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화'가 흘러넘치는 오늘을 ‘분노 사회’라고 진단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과연 어떨까요. 최근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자살한 공무원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그를 향한 악성 민원은 지난달 관내 도로의 보수 공사와 관련해 차량 정체가 빚어지면서 시작됐죠. 한 누리꾼은 해당 공사를 승인한 주무관이라면서 죽은 공무원의 이름과 연락처를 온라인에 공개했고, 분노한 이들의 ‘응징’이 계속됐습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분명히 지나치게 무거웠을 이 분노가 올바른 방향으로 겨누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따라붙습니다.
우리의 분노가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를 돌아봅니다. 마땅히 관대해야 할 이들에게는 높은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정작 그러지 않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관대한 건 아닐까요.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자신을 돌아봤던 시인 김수영의 60년 전 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로부터 2024년의 대한민국은 그리 먼 곳에 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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