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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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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으로 말한다.
서한, '이응' 부분 ('동시마중' 제51호, 2018년 9·10월호)
어린이 당신이 긴 겨울을 뚫고 마침내 핀 목련꽃을 올려다보며 아! 하고 감탄할 때. 좁은 바위틈에서도 머리를 내민 버섯을 보고 아? 하고 의아해할 때. 장맛비 오던 길에 밟혀 짓눌린 지렁이를 보고 아… 하고 말을 잇지 못할 때. 세 자릿수 숫자를 읽는 법을 깨우치며 아~ 하고 배워갈 때. 이 세계엔 무수히 고유한 아! 아? 아… 아~ 가 있다는 것을 당신을 통해 배웠습니다. 평범한 일상 곳곳에서 감탄사를 쏘아 올리는 당신을 통해 세계 구석구석에 숨겨진 아! 아? 아… 아~를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당신이 어떤 감탄사를 만나게 될지, 당신을 통해 어떤 감탄사를 또 발견하게 될지 설렙니다. 당신과 저는 어쩌면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라 같은 감탄사를 나누어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몸을 뒤집으려고 버둥거릴 때. 오오오~ 당신이 첫걸음을 떼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을 때. 우와와~ 당신이 출렁이는 바다를 그리며 한 획 한 획 선을 그을 때. 이야야~ 당신이 아끼는 장난감을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호오오~ 당신의 몸짓에 추임새로 응답하며 서로를 북돋는 모음의 활용법을 배웠습니다. 응답으로 이어지는 추임새의 질감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우와! 아빠 칼질 잘하네” 하고 저에게 추임새를 넣어주었을 때 조금 더 신나게 도마 위 양파를 썰 수 있었습니다. 오오, 우와, 이야 하며 응답하는 방법을 익히며 이 세계와 조금 더 실감 나게 이어질 수 있었답니다. 당신과 또 어떤 추임새를 서로 주고받으며 세계의 질감을 쌓아나갈지 설렙니다. 서로의 삶에 다양한 모음으로 이루어진 추임새로 지지하며 우리는 쌓여갑니다.
모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임을 당신을 통해 배웠습니다. 당신과 내가 주고받은 모음들이 보이지 않는 품의 마음을 탄생시킨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모국어라는 거, 이 품의 느낌 속에서 탄생한 소리는 아닐지. 이 느낌이라는 거, 왜 잘 잊히지 않는지. 모음이라는 거, 몸속 이 느낌과 왜 이토록 긴밀한 것인지. 서로의 느낌을 마주한다는 거, 서로의 모음을 돌보겠다는 다짐은 아닌지. 가족이라는 거, 감탄사와 추임새를 주고받으며 만들어가는 모음의 공동체는 아닌지.
당신을 통해 가족,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삶의 순간들 속에서 모음의 공동체로 이어져 있다는 '진실’한 순간 속에 가족의 자리가 있지 않을까? 서로의 곁에서 오랫동안 비비고, 토닥이고, 쓰다듬으며 '이어져 있다'라는 (진)실감 속에 가족의 자리가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주고받은 눈길, 손길, 발길을 따라 이어지는 질문들 속에서 저는 자꾸만 가족, 이라는 말을 다르게 정의 내려보고 싶어집니다.
혼인 의례를 했을 때 우리는 반려자 선언을 했습니다. “하나, 지구와 어울려 사는 품위를 갖추며 살겠습니다. 생명 가진 것들과 우정을 나누며 지구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품위를 갖추도록 애쓰겠습니다. 하나, 곁을 가꾸며 살겠습니다. 곁이 우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처럼 기꺼이 우리도 누군가의 곁이 되어 살도록 하겠습니다.” 혼인 의례 때부터 우리는 뭇 생명체의 반려자, 곁의 반려자로 살아갈 것을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가족, 이라는 말보다 ‘반려자’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합니다. 반려견, 반려묘, 반려 식물, 반려사물...과 다르지 않은 평평한 존재로 반려-존재자를 떠올립니다.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돌아보고, 서로 뒤섞이는 “중요한 타자”(도나 해러웨이)로 맞이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려한다는 것,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충실히 돌보는 ‘사이’의 이름입니다. 저는 당신의 초등학교 입학을 맞아 반려자 선언문에 추가하고 싶은 항목을 하나 제안할까 합니다. “하나, 서로의 모음을 돌보며 살겠습니다. 감탄하는 모음, 흐느끼는 모음, 간지러운 모음, 말이 되지 못한 모음, 자지러지는 모음들을 서로 돌보는 반려자로 지내겠습니다.”
저는 모음들의 공동체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팽목항에서 먼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으으흐으으 공동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이후 추모 집회에서 이런 세상에 더 이상 살 수 없다던 여성들의 으흐흐흐으 공동체. 밀양 송전탑 아래에서 공사를 저지하다 다쳐 얼굴에 피가 흥건한데도 삶의 터전을 빼앗길 수 없다고 지켜선 할머니들의 아아아아악 공동체. 지하철 역사에서 질질 끌려 나가면서도 자식 죽이는 부모로 만들지 말라! 장애인 권리를 보장하라!는 부모들의 아아악앜앜의 공동체. 차마 말이 되지 못해 울먹이고, 울부짖는 모음들이 서로 모여 공통의 모음 속에서 물러설 수 없는 전선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선을 타고 흐르는 물러설 수 없다는 저항의 전류가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통의 모음들이 해방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회적 모음들은 사회적 마음을 만들어냅니다. 어쩌면 모음은 문자 이전의 마음인 것만 같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랬듯 모음 속에서 만나는 마음들에게 늘 배우고자 합니다. 이 모음의 공동체와 반려하며 지내겠다, 는 반려 선언을 함께 다짐해보는 건 어떨까요?
세계에는 서로를 돌보는 다양한 반려 형태들이 있습니다. 개, 고양이, 앵무새와 같이 비인간 동물과 반려하기도 하고, 유칼립투스, 목화, 알로에와 같은 비인간 식물들과 반려하기도 하고, 칼, 도마, 국자와 같은 비인간 사물들과 반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무수한 감정의 모음들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이로 반려하며 충실히 살아가겠다, 맹세하여도 반려자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시민 인간들이 있습니다. 동성이라는 이유로,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미등록 체류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들은 이성애·혼인·혈연관계만을 정상가족으로 규정하는 민법 제779조(1.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2.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 앞에서 가로막힙니다. 시민으로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 채 사회적 안전망 바깥으로 내몰립니다.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관계인 생활동반자, 사회적 가족, 네트워크가족 등 실질적인 돌봄과 친밀성을 실천하는 다양한 관계를 지원하는 법이 꼭 필요합니다.
서로를 지속적으로 돌보는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반려’하는 사이인 사람들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면, 우리 세계는 얼마나 알록달록해질까요? 당신의 등굣길과 교실은 또 얼마나 다채로울까요? 서로를 돌보고 지지하는 모음의 공동체로 이어져 있는 ‘긴밀’한 관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당신도 차마 말이 되지 못하고 모음으로만 맴도는 친구들의 마음을 잘 돌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함께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비인간 동물-식물-사물들의 모음에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에겐 말할 수 없는 모음으로 이루어진 당신만의 비밀을 잘 돌볼 수 있으면 합니다. 이 모음들과 '반려'할 수 있기를, 이 모음들과 '동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어린이집 졸업과 초등학교 입학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당신을 통해 만나게 될 아! 아? 아~ 아... 의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에 설렙니다. 실감 나게 우와! 으음? 이야~ 오오... 추임새를 넣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견고한 이 세계를 두드리며 다양한 모음들을 만나봅시다. 서로를 돌보며 근사하게 반려해봅시다.
-2024년 봄날. 당신의 반려인간 서한영교 드림.
이응으로 있다.
서한, '이응' 부분 ('동시마중' 제51호, 2018년 9·10월호)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번 글 서두와 말미의 시에서 '서한'은 서한영교 작가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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