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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밭에 뒹구는 시커먼 사과... "괴물 날씨 우짤 수 없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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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구(나무) 가까이 보면 꽃눈이 달려 있잖껴. 이게 삐쪼꼬롬(삐쭉한 모양)한 게 잘 자라.”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막 지난 8일, 갓난아기 손가락을 잡듯 조심스럽게 사과나무 가지를 살피던 김부득(65)씨는 한참이 지나서 허리를 폈다. 가지 끝에 봉긋하게 올라온 꽃눈이 다치진 않았는지, 평년에 비해 빨리 따뜻해진 탓에 뿌리에서 물이 빨리 올라와 가지가 말랑해진 건 아닌지 나무 구석구석을 만져본 뒤였다.
‘사과의 고장’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산기슭에서 사과 농사만 40년째. 시험 삼아 설치한 방상팬(서리 방지 팬) 두 대 덕분에 작년의 ‘날씨 폭탄’을 그나마 비켜갔지만, 사과나무 1,100그루가 심어져 있는 밭을 둘러본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도 2월에 비가 억수로 와서 오늘같이 해가 쨍한 날이 하루밖에 없었시.” 올해도 사과 농사가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다.
10분가량 떨어진 점곡면에서 사과나무 약 2,200그루를 재배하는 조장래(59)씨의 고민은 더하다. 농장 곳곳에 검게 멍들고 흐물흐물해진 반쪽짜리 사과가 굴러다녔다. 작년 날씨가 할퀴고 간 흔적이었다. 사과 농사만 30년째 짓고 있는 조씨에게 작년 같은 1년은 ‘난생처음’이었다.
사과는 예민한 과일이다. 4월 초 꽃눈이 진분홍색 꽃봉오리가 되고, 연분홍색 꽃잎을 열었다가 하얀 꽃이 지면 사과가 맺힌다. 작년엔 날이 따뜻해 꽃봉오리가 빨리 맺혔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서리가 내려 사과 꽃만 6번이 떨어졌다. “꽃이 한 번 떨어질 때마다 사과 크기도 작아지는데, 작년엔 정말 띵챘지(열받았지).”
봄 서리에도 견디던 사과가 붉게 익어갈 무렵, 폭염과 긴 장마가 찾아왔다. 미리 쳐둔 방제약도 소용없었다. 날이 습한 데다 비가 와서 햇빛을 못 보니 사과 열매에 흑갈색 반점이 생겼다. 탄저병이었다. 검은 반점이 사과를 뒤덮다 못해 껍질이 물러버렸고, 사과는 힘없이 가지에서 툭 떨어졌다. 수확해야 하는 10월엔 우박이 쏟아졌다.
날씨 탓에 사과 40%를 버렸다는 조씨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올해도 꽃눈이 보름 이상 빨리 올라오기 시작해서다. “방상팬 설치 신청도 하고 방제 약품도 넉넉히 준비했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작년에 워낙 안 좋았어서 꽃씨방이 부실해 꽃이 잘 맺힐지도 모르겠구먼.”
사과나무가 어엿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적어도 5년이 걸린다. 골고루 햇볕을 쬐게 해야 해 수백 번은 이리저리 만진 과일이 시커멓게 멍든 것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단다. ‘사과가 물가를 오르게 한 주범이 됐다’는 뉴스다.
“내 손에선 2,000원도 안 하던 게 저 가선 5,000원이 넘는다자녀.” “우리도 농사 잘하고 싶제. 근데 이 괴물 같은 날씨를 우짤 수가 없잖여. 내 속이 지금 저 사과처럼 시커매.”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던 정부를 원망하는 말도 튀어나왔다. “가격 오르니까 이제 와서 허겁지겁 뭘 하겠다는 겨. 이미 작년 초부터 날씨는 이상했구먼.” “마트에 돈을 주면 뭐하노. 유통 전체를 봐야 되지 않켔나.” 사과가 비싸니 수입하면 안 되냐는 말도 씁쓸하기만 하다.
주말도 없이 시간마다 날씨를 점검해 농가에 연락을 돌리고 있다는 서경화 경북도청 과수화훼팀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하고 있는데, 기도발 좋다는 팔공산 갓바위라도 좀 다녀오면 나아질랑가.”
사과밭을 보며 바싹 마른 입술을 뜯던 이들의 시선이 잠시 하늘을 향했다. 한숨이 더 깊어졌다.
<상> 금사과 미스터리
<하> 사과만의 문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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