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학전!

입력
2024.03.13 16: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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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김민기 학전 대표가 학전 블루스 소극장의 김광석 부조상(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학전 제공

김민기 학전 대표가 학전 블루스 소극장의 김광석 부조상(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모습. 학전 제공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학전’은 배울 학(學), 밭 전(田)을 쓴다. 문화예술계 인재들의 ‘못자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설립자인 김민기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못자리 농사로 사람을 촘촘히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도록 한다. 33년간 이 역할을 차고 넘치도록 해온 학전이 15일 문을 닫는다.

□ 학전은 1991년 개관해 배우 황정민, 설경구,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방은진, 장현성 등을 배출했다. 또 고 김광석, 박학기, 이소라, 노영심, 윤도현, 안치환 등이 꿈을 펼쳤다. 김광석은 이곳에서 1,000회 공연을 하며 ‘전설’이 됐다. 김 대표가 연출한 ‘지하철 1호선’은 73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독일 원작이지만 한국적 각색과 번안으로 한국 뮤지컬의 대명사가 됐다. 김 대표는 ‘아침이슬’ ‘상록수’의 작사·작곡가로 대중에게 유명하지만, 뛰어난 극작가·연출가이기도 하다.

□ 김 대표는 ‘못자리’라는 정체성에 충실했다. ‘지하철 1호선’이 15년간 4,000회 공연을 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만, 2008년 돌연 중단했다. 이후론 간헐적으로만 공연을 했다. ‘성공’에 가려 해야 할 것을 놓칠 수 없어서다. 김 대표는 어린이극·청소년극을 중시했고, 그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학전이 주최한 마지막 공연도 아동극 ‘고추장 떡볶이’였다.

□ 폐관 예정이 알려지자 배우·가수들이 나서 학전을 살리고자 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학전 소극장을 재정비해 정체성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뜻을 잇되 학전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암 투병 중이다. 장현성씨는 유퀴즈에 출연해 “김민기 선생님은 관객이 없어도 배우들에게 최소 개런티를 책정해 지급했고, 큰 공연이 망하자 집을 팔아 개런티를 주려고 해서 ‘못 받겠다’는 배우들과 싸웠다”고 했다. 학전의 폐관을 마주하며 어떤 이름은 계속 사용하기보다, 그 이름을 아름답게 만든 이의 소유로 온전히 남겨야 할 때도 있다는 걸 배운다.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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