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에 불어닥친 미중 패권 경쟁
전쟁 격화·역습 등 군사용어까지 등장
초격차·협력으로 독자 위치 구축해야
“한미 AI(인공지능) 반도체 전쟁 격화.” “미 반도체의 역습.”
지난주 국내 경제 기사에 등장한 군사 용어들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D램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의 경쟁이 치열했던 1990년대 이후 오랜만에 경제 기사에 전쟁 용어가 늘어나고 있다. 1998년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D램 최대 생산국이 됐다. 이후 일본이 D램 경쟁을 포기하고 제작 장비 등에 집중하는 등 전 세계 반도체 밸류 체인은 경쟁보다는 분업과 협력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래서 잠시 망각했지만, 지금의 반도체 산업은 미·소 무기 경쟁 과정에서 토대가 형성됐고, 미국을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이끈 원동력이다. 지난해 출간돼 반향을 일으켰던 미 국제사학자 크리스 밀러의 책 ‘칩워’는 반도체 산업과 패권 경쟁의 관계를 추적한다. 요약하면, 1960년대 소련에 우주 개발에서 뒤처진 미국은 역전을 위한 비장의 무기로 ‘반도체’를 생각했다. 현대 반도체 산업의 원조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첫 대량 구매 고객이 바로 미 항공우주국(NASA)이다. 발전의 두 번째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다. 미 정부는 압도적 화력이 북베트남 군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고, 명중률을 높일 정밀유도 무기에 사용할 민간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지원한다. ‘펜타곤의 상쇄 전략’으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1991년 걸프전에서 성공을 입증했다. 그 주역이 정보통신 전공자로 나중에 국방부 장관까지 오른 윌리엄 페리다. 정부가 민간 기업의 혁신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적은 비용과 높은 효율성을 유지하며 경쟁국을 압도한 것이다.
이후 반도체는 세계화와 자유 무역을 동력 삼아 빠르게 발전했다. 설계는 미국, 생산 장비는 일본과 유럽, 생산은 한국과 대만으로 국제분업이 확립됐다. 그런데 중국의 부상과 무기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분업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 전쟁은 첨단 센서, 통신, AI가 주역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은 데이터, 알고리즘, 연산력 3요소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데, 중국은 이미 데이터와 알고리즘에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고, 연산력 즉 반도체 기술에서만 뒤진다. 미국이 한국 미국 일본 대만을 ‘칩4’라는 반도체 동맹으로 묶고, 중국에 첨단 반도체 기술 이전을 철저히 봉쇄하는 이유다.
가격과 성능이 우선시되던 반도체 업계에 애국심과 독점이란 욕망이 스며들면서, 반도체 생산에서 한국과 대만에 밀렸던 미국과 일본 기업들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설계에 주력하던 미 인텔 등이 반도체 양산 경쟁에 뛰어들고, 일본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생산시설 재가동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한국만 외톨이가 되는 게 아닐지 하는 불안감이 생길 만하다. 하지만 독점과 배제만으로 승자가 되기엔 현재 반도체 글로벌 밸류 체인은 너무 크고 복잡하다. 최근 9,000조 원이 넘는 돈을 모아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겠다는 샘 올트먼 오픈AI CEO의 계획에 대해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 정부가 천문학적 돈을 투입해도 효과가 없었다”며 “반도체 산업의 근본 난제는 기술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반도체는 천문학적 지원으로도 쉽게 모방 못할 기술과 노하우가 무수히 많이 숨어있는 세계다. 또 분업 협력만큼 경쟁도 치열한 세계다. 미국 정부가 아무리 ‘팀 USA’를 외친다고, 인텔과 엔비디아가 한 팀이 될까? 또 대만 TSMC가 일본에 공장을 짓는다고, 파운드리 핵심 노하우를 일본에 제공할까? 메모리 반도체 최강인 한국이 미국의 ‘새로운 상쇄전략’ 속에서 생존할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경쟁자가 따라오지 못할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배제와 독점이 아니라 포용과 협력이 반도체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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