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정치 나눴던 당대 평가 뒤집혀
진보진영 일방 왜곡에 파렴치한 전락
적어도 국가건설과 존속의 공로 크다
12·12 군사반란은 숱한 발굴 기사와 논문, 법정 기록 등을 통해 완벽하게 알려진 사건이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도 상세한 재현으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 '서울의 봄' 도입부의 자막, '…철저히 감춰졌던 이야기다'에 아연했던 게 그래서다. 관객들은 자신의 무지 무관심을 은폐 세력 탓으로 돌리고 홀가분한 분노를 드러냈다. 역사란 게 솜털처럼 가볍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논란이 10여 년 새 세 번째다. MB 때 KBS 다큐로, 박근혜 때 좌파 진영의 '백년전쟁' 다큐로, 이번엔 독립영화 '건국전쟁'으로 미화와 폄하 논란을 오간다. 4·19혁명 이후 60년도 더 지난 사이 더는 추가할 게 없을 만큼 자료와 연구가 축적돼 있다. 여기에도 은폐는 없다. 역시 무지와 무관심만 있다.
'건국전쟁'에서 회심의 발굴 문서처럼 나오는 유어만 비망록도 오래전 보도됐던 것이다. 해방 전후사를 보정할 만한 사료인데도 이후 사장됐다. 워싱턴 카퍼레이드, 4·19 부상 학생 방문도 신문자료들이어서 새삼스럽지 않다. 방치된 역사였다. 이념 싸움판에서 보수우파 진영이 약세였던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 평가는 일찌감치 당대에 내려져 있었다. 어릴 적 어른들에게 듣던 얘기가 '외교는 귀신, 정치는 등신'이었다. 귀신같은 외교로 나라를 세우고 전쟁통의 나라를 구했으나, 등신 같은 인사와 정치로 나라를 망쳤다는 뜻이다. 곱씹을수록 이 이상 명쾌한 평가는 없다. 이 평가 틀은 박정희 시대까지 내내 유지됐다.
뒤집힌 건 진보좌파 진영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이 80, 90년대 운동권의 바이블이 되면서다. 특히 북한에 정통성의 무게를 둔 NL 계열이 민주화의 공을 독식하면서 이승만은 탐욕과 권력욕의 화신으로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해악만 끼친 분열주의자, 해방 후엔 민중의 통일 의지를 꺾은 분단의 원흉이 됐다.
무엇보다 국가 정통성 계승 책임을 진 대통령들까지 이런 인식의 확산과 고착화에 앞장선 언동은 차마 용납하기 어렵다. DJ는 대한민국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나라로, 노무현은 "정의가 패배한 역사"로 규정지었다. 소련의 분할정부 계획과 이를 따른 김일성의 선제적인 단정(單政) 체제 구축 작업, 김구조차 이를 기정사실로 했다는 사실 등에는 눈을 감았다.
이승만 재평가는 비난과 조롱을 받았던 정치 행위까지 다 뒤집어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적어도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공로만큼은 사실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아무런 독자적 힘 없이 절망적이던 해방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탁월한 전쟁지도자로서 나라를 구하고 국가 존속의 기반을 만든 건 누가 뭐라든 그의 업적이다. 다른 인물을 대입해 봐야 더 나은 답은 나오지 않는다.
역사적 행위는 결국 역사에 의해 평가되는 법이다. 그의 과 또한 크고 무겁되 최소한 대한민국의 기초를 세운 건국 대통령이란 사실마저 인정치 않고는 세계사의 기적인 대한민국의 도약 과정과 선진국에까지 진입한 현 국가 위상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물론 그렇다 해도 '건국전쟁'이 촉발한 재평가 분위기가 행여 이를 넘어 그 전체를 신성시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길 바란다. 지나침은 반드시 또 역풍을 부르는 법이다.
(관련해 전 언론인이자 문민정부 각료를 지낸 오인환의 '이승만의 삶과 국가' 일독을 권한다. 치우침 없는 공정한 시각을 갖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 일례로 선구적 민주주의자인 이승만이 반민주적 독재정을 편 이율배반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초엘리트로서 당대 민중을 다만 계도대상으로 봤기 때문이란 해석은 탁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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