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탕·표절 논쟁에 '넘버링 참사'까지… 총선 공약 수난시대

입력
2024.03.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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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정치에 존재감 떨어진 정책 경쟁
대선 공약 재활용에 재원책도 없어

이재명(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구립 큰숲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점심 식사 자리에 반찬을 나르고 있다. 고영권 기자

이재명(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12월 21일 서울 영등포구 구립 큰숲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점심 식사 자리에 반찬을 나르고 있다. 고영권 기자


"국민의힘의 주7일 경로당 점심 제공은 더불어민주당 공약(주5일 제공)을 잘못 커닝한 오답이다."

김민석 민주당 총선 상황실장



더불어민주당 총선 상황실장을 맡고 있는 김민석 의원은 최근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겨냥해 “정책을 공부하고 생각하길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국민의힘이 내세운 ‘주7일' 경로당 점심 제공 공약이 민주당이 앞서 공개한 '주5일' 제공 공약을 부랴부랴 베꼈고, 인력과 예산 부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실한 공약이라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21일 주5일 경로당 점심 제공 공약을 발표했다. 국민의힘은 지난 6일 주7일 경로당 점심 제공 공약을 내놓았다. 민주당으로서는 한 달 반 뒤에 국민의힘이 꺼낸 ‘확장판’ 공약이 달가울 리 없다. 뒷북이라지만 국민의힘은 재택 의료 혜택까지 더해 민주당과 차별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장년층 표심 잡기’가 절실한 민주당의 기운을 빼는 대목이다.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는 이개호 의원은 1일 “우리가 괜찮은 정책 발표를 준비하면 국민의힘에서 준비해 따라 한다”며 “여야 발표 일정이 겹치거나, 우리의 정책 발표 일정이 미뤄지는 것도 이런 배경 탓”이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국민의힘도 할 말은 있다. 철도 지하화, 소상공인 보호, 소방공무원 지원 등 민주당보다 앞서 발표한 공약이 여러 개 있기 때문이다.

시행 중인 공약 끌어다 "총선 공약"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철도 지하화를 공약으로 내건 가운데 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신정차량기지 위에 지어진 주택단지의 모습. 이한호 기자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철도 지하화를 공약으로 내건 가운데 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신정차량기지 위에 지어진 주택단지의 모습. 이한호 기자


거대 양당은 서로를 비판하지만 총선 공약들을 살펴보면 여야 모두 표절, 재탕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간 여야가 똑같이 내던 ‘간병비 급여화’와 ‘철도 지하화’는 모두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대선 공약에 포함된 내용을 우려먹었다. 민주당이 원조라고 주장하는 주5일 점심 제공도 따지고 보면 2022년부터 전남 담양군, 보성군, 충북 제천시 등 고령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복권기금 등을 활용해 먼저 정착시킨 사업들이다. 전국적으로 식사 바우처 제공 등 형태를 약간씩 변형해 비슷한 내용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목진휴 국민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선거 때마다 시민사회 단체나 전문가들이 모여 여야의 총선 전략을 평가하고, 예산 분석에 대한 타당성을 검증해주곤 했는데, (선거가) 지나면 끝이었다”며 “그냥 기록으로만 남는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책이나 공약에 대한 저작권도 없는 데다, 갈수록 팬덤, 계파 기반 정치가 심해지면서 공약의 중요성도 줄어들다 보니 여야 모두 공약을 요식행위로 보는 경향도 있다”고 지적했다.


넘버링 참사, 콘셉트 표절 논란도




한동훈(가운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18일 저출생 관련 공약인 일·가족 모두행복이 담긴 국민택배를 들고 서울 강남구 휴레이포지티브로 들어가고 있다. 뉴스1

한동훈(가운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1월 18일 저출생 관련 공약인 일·가족 모두행복이 담긴 국민택배를 들고 서울 강남구 휴레이포지티브로 들어가고 있다. 뉴스1


공약이 비슷하다 보니, 이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혼선과 논란이 빚어지기도 한다. 민주당 정책위 관계자가 이따금씩 ‘이번이 대체 몇 호 공약이냐’는 질문을 받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책위에서는 공식적으로 공약 순서를 매기지 않았음에도, 정책 발표 초반 홍보 과정에서 1호, 2호, 3호 등 순서를 매겨 발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정책위 한 관계자는 “첫 총선 공약은 3만 원으로 수도권 대중교통 무제한으로 다니는 청년패스(지난해 11월 23일)였다”며 “홍보 과정에서 닷새 뒤 발표된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 공약이 1호로 홍보돼 스텝이 꼬인 건 사실”이라고 했다. 이후 이재명 대표 피습(1월 2일) 사건으로 공약 발표가 밀리고, 공천 논란 등으로 주목도 또한 떨어지면서 '공약 수난시대'로 흐르고 있다.

국민의힘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민주당과 달리 공약 포장 작업은 착착 진행된 모습이지만, 공약 발표 초기 ‘콘셉트 표절’ 논란을 겪었다. 한 위원장이 택배요원 차림으로 직접 정책 공약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형태의 이른바 ‘국민택배’ 프로젝트인데, 이는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의 ‘문재인 1번가’ 공약 배달과 비슷한 형태라 빈축을 샀다. 한 위원장이 1호 공약(일·가족 양립)을 배송하기 위해 찾은 업체도 지난해 정부 보조금 부정수급이 적발된 업체로 드러나 재차 망신을 당했다.


“유권자들, 재원 마련책 꼭 살피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매직짐 휘트니스에서 열린 직장인 간담회에 앞서 트레이너로부터 운동을 배우고 있다. 고영권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서울 서대문구 매직짐 휘트니스에서 열린 직장인 간담회에 앞서 트레이너로부터 운동을 배우고 있다. 고영권 기자


여야 신경전은 뜨겁지만 전문가들은 ‘그 밥에 그 나물’ 격이라며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 있는 공약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문한다. 특히 유권자에게는 공약을 살펴볼 때 내용만큼이나 재원 조달 가능성을 살펴보라고 조언했다. 이용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약에는 실현 가능성과 구체성이 뚜렷해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재원 마련책”이라면서 “여야가 내세운 공약 자료만 보면 이 부분이 거의 빠져 있다”고 짚었다.

이 교수는 여야가 핵심 재원 조달책으로 ‘민자 유치’를 꼽은 철도 지하화 정책을 “마구잡이로 던지는 공약”이라고 언급하면서 “공사비뿐 아니라 부지 매입 등에 많은 비용이 선제적으로 투입돼야 하는데 재원 확보 방안이 사실상 전혀 제시되지 않은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유권자들도 정책 발표 때 실현 가능성을 담보할 재원 확보책을 먼저 살펴보고, 잘못된 공약은 걸러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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