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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지렁이의 습격으로 리셋된 세계...탐욕이 사라지니 천국이 왔다

입력
2024.03.01 14:30
11면

정세랑 ‘목소리를 드릴게요’

편집자주

인공지능(AI)과 로봇, 우주가 더는 멀지 않은 시대입니다. 다소 낯설지만 매혹적인 그 세계의 문을 열어 줄 SF 문학과 과학 서적을 소개합니다. SF 평론가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해 온 심완선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지음·아작 발행·272쪽·1만4,800원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지음·아작 발행·272쪽·1만4,800원


하늘에서 거대 지렁이가 떨어진다. 지렁이와 그에 딸린 선충은 특이하게도 인공물을 먹어 치운다. 플라스틱, 화학섬유 등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그냥 두면 한 세기가 지나도 썩지 않을 물건이 지렁이를 거치면 금세 흙으로 분해된다. 도시는 지렁이의 먹잇감이다. 사람들은 더는 마천루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없다. 세상은 리셋된다. 정세랑의 단편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수록된 ‘리셋’의 내용이다.

분류하자면 이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속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재앙 이후’라는 뜻으로, 세상의 종말과 그 후를 그리는 SF의 하위 장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소수만 살아남거나 다른 존재로 변이한다. 문명을 이루는 기반이 한순간에 사라지므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리셋’에서도 미래 사람들은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의 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에 거주지를 건설하며, 버려지는 자원이 없도록 모든 것을 철저히 재활용한다. 식량은 먹을 만큼만 생산한다. 여분의 물건을 쌓아두는 재고 같은 개념은 없다. 독자들의 현재를 풍요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빈한하다.

그런데 인물들의 태도는 상당히 낙관적이다. 그들은 리셋을 긍정한다. 비록 거대한 재난이긴 해도, 거대 지렁이의 습격은 이전에 자행되던 인류의 과오를 멈추는 역할을 한다. 덕분에 멸종, 고갈, 낭비, 착취가 사라진다. 인간 외의 생물종은 지상에서 마음껏 번성한다. 인간의 몫은 대폭 줄어든다. 등장인물들은 내심 고소하다고 생각한다. 혹은 잔잔한 만족감을 느낀다. 자신이 잃은 것보다 다른 종이 얻은 바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리셋은 인간이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생활방식으로 돌아서도록 재탄생하는 계기다. 지구 환경과 생태계 전반에 무해하고 온건한 존재가 되도록,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행성의 규모로 세상을 인식하도록.

그래서인지 인물들은 어딘가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리셋으로 소중한 이를 잃는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비롯해 온갖 아름다운 것들과 각종 편리한 발명품이 사라진다. 그래도 그들은 아련한 슬픔을 느낄 뿐, 곧바로 자신을 덮친 변화를 긍정한다. 감정은 한없이 유예된다. 이렇게 보면 ‘리셋’은 올바름을 위해 욕망을 거세한 모형 정원이다. 인간의 후안무치한 탐욕에 진저리를 치던 신이 만든 천국이다. 소설 속에는 빛이 반짝이지만 그것은 ‘맑은 눈의 광인’의 눈빛과도 닮았다. 나는 여기서 위안을 얻는다.

‘기후 우울’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다. 너무 많이 죽고, 너무 많이 무관심하다. 환경과 미래에 마음을 쓸수록 절망감이 강해진다. 애써봤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듯 느껴진다. 이럴 때 ‘리셋’은 명쾌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우리에게 거대 지렁이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 소식은 어딘지 시원하다. 픽션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쾌감이다.

같은 책에 수록된 ‘리틀 베이비블루 필’의 마지막 문장을 빌리고 싶다. “모든 것을 바꿔 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문학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바꾼다. 우리가 다시 어딘가로 출발할 수 있도록 마음을 회복시킨다.

심완선 SF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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