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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과 결혼해줘’, 여성들 간 격차에 대한 불길한 상상력

입력
2024.03.02 04:30
20면

<157> ‘정규직 피해자’의 ‘비정규직 가해자’ 복수라니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 강지원(오른쪽·박민영 분)과 정수민(송하윤 분)이 대립하고 있다. tvN 유튜브 갈무리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 강지원(오른쪽·박민영 분)과 정수민(송하윤 분)이 대립하고 있다. tvN 유튜브 갈무리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돼 있습니다.

타인의 삶을 사는 이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삶을 사는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인물들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삶의 알레고리다. 자신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듯 보이)는 이의 생명을 빼앗고 그의 삶을 대신 사는 인물이란, 끝없는 자본 축적과 소비의 연쇄 고리 속에서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대체 가능한 존재가 돼버린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1955년 미국에서 출간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는 이런 이야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뉴욕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리플리의 ‘재능’은 다른 사람으로 능숙하게 위장하는 능력이다. 그는 우연히 만난 조선업 경영자의 부탁을 받고 유럽에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아들 디키를 데리러 갔다가 디키를 죽이고 디키의 삶을 산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작)와 '리플리'(1999년작)가 이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1999년작 영화 '리플리'에서 디키(주드 로 분)와 리플리(오른쪽·맷 데이먼 분)의 모습. '리플리' 스틸컷

1999년작 영화 '리플리'에서 디키(주드 로 분)와 리플리(오른쪽·맷 데이먼 분)의 모습. '리플리' 스틸컷

'화차'라는 작품도 있다. 1992년 일본에서 출판된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인데 아버지의 주택담보대출 빚을 떠안은 여성 교코가 빚쟁이들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른 여성 쇼코를 죽이고 그녀로 삶을 살다 마침내 발각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비극은 쇼코 또한 개인파산을 했다는 데 있다. 소설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여성 중 한 명이 그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상대방을 죽였지만 벗어나기는커녕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을, 그녀를 좇는 형사의 눈으로 실감 나게 그려낸다. 영화 '화차'(2012년작)는 2009년 용산참사를 연상케 하는 등 한국적 상황의 변주가 흥미로운 영화다.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와 '화차'가 여러모로 뇌리에 남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은 당시 시대상이다. '재능 있는 리플리'는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진영의 리더 국가로 부상한 미국 내 계급 격차와 그에 따른 강렬한 원한을 당시 만연했던 동성애 혐오와 겹쳐서 보여준다. '화차'는 거품경제 붕괴 이후 1990년대 일본에서 다중채무자와 개인파산의 급격한 증가가 낳은 불안과 아귀다툼을 증언한다. ‘거짓말을 사실로 믿고 눈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이어 나가는 증상’을 일컫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고, 채무의 연쇄고리를 견디다 못한 자살자가 속출하는 지금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작품들이니 아직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비정규직 상간녀’라는 새로운 악녀의 형상

최근 화제를 모으며 종영한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도 타인의 삶을 강렬하게 열망해 그녀의 모든 것을 뺏(은 듯 보이)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주인공 강지원(박민영 분)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정수민(송하윤 분)이다. 정수민은 강지원의 둘도 없는 친구를 자처하지만 실은 그녀의 착한 성품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정규직으로 일하는 강지원의 추천으로 지역 대학(지방대!)을 졸업한 정수민은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정수민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강지원의 남편 박민환(이이경 분)을 유혹해 관계를 갖는다. 암에 걸린 강지원은 둘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 박민환과 다투다가 그가 밀어 유리로 된 탁자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한다.

되살아난 강지원이 두 번째 삶을 살면서 이 모든 상황을 돌려놓는 과정이 드라마의 주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차고 넘치는 능력과 착한 성품을 갖춘 강지원이 바로 그 이유로 참고 견뎌야 했던 회사에서의 성차별과 괴롭힘, 남편의 폭력과 외도, '시월드'에서의 보상받지 못한 노동이 자세하게 그려진다. 시청자들에게 ‘사이다’ 쾌감을 안기는 것은 두 번째 삶을 사는 강지원의 달라진 ‘전투력’과 세세한 복수다. 강지원이 전생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온갖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일들은 현생에서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회상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런 점 때문에 내게는 강지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전의 인생을 바꾼다는 설정이 ‘회귀물’ 장르로서의 특성일 뿐 아니라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성들의 각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다.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의 삶을 선망해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정수민(송하윤 분). tvN 제공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주인공의 삶을 선망해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정수민(송하윤 분). tvN 제공

문제는 강지원의 삶이 복원되기 위해 죽기 전 그의 운명을 대신할 사람이 있어야 하며 그는 당연히 정수민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수민의 삶이 망가져야 한다는 설정이다. 드라마는 이를 정수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 공을 들인다. 정수민은 리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인 강지원의 삶을 선망한다. 그녀는 회사 상사를 ‘오빠’라고 부르며 아양을 떨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능력 있는 강지원의 성과에 편승하거나 빼앗기 위해 간도 쓸개도 내줄 듯 구는 친구인 척도 잘한다. 강지원의 전생에서 정수민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다. 남자들은 그녀의 애교에 반해, 여자들은 그녀의 ‘착한 사람’ 코스프레에 속아 자원을 내어준다.

되살아난 강지원은 정수민과 다르게 ‘능력’과 ‘올곧은 성품’으로 난국을 헤쳐 나간다. 그 와중에 강지원의 전생 남편 박민환과 정수민은 함께 파견 나간 마트에서 연애질을 하느라 시식 행사를 망치고 회사에 보고도 하지 않는다. 이후 회사에서 이 사실이 발각되자 책임이 더 큰 상급자인 정규직 박민환은 부서이동의 징계를 받는 데 그치지만 비정규직 정수민은 가차 없이 해고된다. (심지어 박민환에게는 사내 인트라넷에서 불미스러운 사건 내용과 이름이 검색되지 않는 보호조치도 취해진다. 그는 조직에 남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후 정수민이 강지원인 양 필적을 흉내 내어 자신을 옹호하는 글을 올린 사실이 발각되면서 정수민의 해고는 완벽하게 정당화된다. 함께 같은 잘못을 저지른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다른 징계를 적용하는 차별적이고 불의한 조치가 정수민 개인의 탐욕적 성품 탓으로 정의로운 ‘사이다’가 되는 것이다.

누가 더 ‘리플리적 인물’인가

무엇보다 정수민이 용서받을 수 없는 점은 그녀가 강지원의 전생 남편 박민환의 ‘상간녀’라는 사실이다. 뭣도 없는 여자가 내 남자까지 빼앗다니! 여기까지는 여느 불륜 소재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정서다. 그런데 마침 그 남자가 ‘쓰레기’였고, 주인공이 이 남자를 그 여자에게 ‘분리수거’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찾는 데 성공한다는 상상력이 이 드라마의 새로운 점이다. 이쯤 되면 누가 더 ‘리플리적 인물’인지 알 수 없어진다. 정수민이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강지원의 인생을 탐낸 만큼이나, 강지원 또한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정수민에게 그것을 넘김으로써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제2의 기회’가 넘사벽 계급인 회사 오너의 손자 유지혁(나인우 분)과의 결합으로 가능했다는 점도 둘 중 누가 더 리플리적 인물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수민과 박민환은 ‘상간남녀’고 강지원과 유지혁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점인데, 따지고 보면 현생에서 강지원은 박민환과 결혼하지 않기 때문에 정수민과 박민환은 ‘상간남녀’가 아니다. 오히려 강지원과 유지혁은 둘 다 되살아난 자들이기에 서로의 전생을 알고 있고 전생에서 강지원은 박민환과 결혼한 상태였다. 이를 알고도 ‘사랑에 빠지는’ 둘은, 전생에서 유지혁이 워낙 강지원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운명적인 커플’이라는 식이다. 자원 있는 남녀들이 일단 결혼하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달까.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조합원 100여 명이 2022년 4월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근에서 집회를 위해 결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조합원 100여 명이 2022년 4월 서울 종로구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근에서 집회를 위해 결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IMF 금융위기 이후 정규직의 초과근로 및 임금상승을 해결할 구조적 해법으로 도입됐다. 기업뿐 아니라 정규직 노조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원 없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자원화 또한 그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가부장적 성문화 없이 가능하지 않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이 모두를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한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과의 격차가 개인사와 성품 탓이라고 주장하는 드라마다.

성차별과 여성노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규직 피해자 여성’의 시선으로 ‘비정규직 가해자 악녀’를 혐오하는 재현의 공존이라니.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한국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후퇴해왔는지 고민스럽다. 리플리와 교코/쇼코를 통해 1950년대 미국과 1990년대 일본을 알 수 있듯 정수민을 통해 2020년대 한국을 깊이 있게 드러내는 이야기를 기다린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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