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 원고지 1만8000매 ...한국인 손으로 쓴 첫 '세계철학사'

입력
2024.03.05 16:42
수정
2024.03.05 16:54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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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세계철학사 4' 출간
2000년 이후 24년 만에 세계철학사 마무리
한 개인이 쓴 철학사 개설서로는 최초
"대중의 철학사에 대한 갈증 풀어주고 싶었다"

사반세기에 걸친 세계철학사 시리즈 저술을 끝낸 철학자 이정우. 도서출판 길 제공

사반세기에 걸친 세계철학사 시리즈 저술을 끝낸 철학자 이정우. 도서출판 길 제공


"첫 책은 2011년에 나왔지만 '철학사를 내 손으로 한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2000년 철학아카데미 때부터예요. 학교 밖으로 나와 강의를 해 보니 철학사에 대한 호응, 그리고 갈증이 대단하더군요. 거기에 부응해야겠다 싶어서 구상하고 준비한 거니까 24년, 거의 사반세기가 걸린 작업이네요. 허허."

'세계철학사 4 : 탈근대 사유의 지평들'을 내놓은 철학자 이정우(65) 소운서원 원장은 전화기 너머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2000년부터 구상해서 2011년 첫 책 '세계철학사 1 : 지중해 세계의 철학'을 냈고 이후 '세계철학사 2 : 아시아 세계의 철학' 그리고 '세계철학사 3 : 근대성의 카르토그라피'를 거쳐 이번 책까지. 서양철학, 동양철학에 이어 근대철학, 그리고 탈근대철학까지 모두 정리하니 원고지 기준으론 1만8,000매 분량이었다. 책으로는 3,220쪽(4권이라 권당 평균 805쪽)에 이르는 대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쏟았다. 지금은 건강을 해쳐 치료 중이기도 하다.


동서양 묶고 시대 상황 녹여 넣은 철학사


이 작업이 주목받은 것은 두 가지 지점이다. 하나는 이 원장 개인의 작업이라는 점. 세계철학사는 어느 한 개인이 다루기엔 벅찬 것이라 학회 등의 차원에서 편집위원회를 구성, 각 분야별로 나눠서 서술한 뒤 종합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다 해도 세계철학사라곤 하지만 동양철학을 약간 곁들여 놓은 서양철학사 수준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이 원장은 홀로, 그것도 동서양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도전했다.

또 하나는 역사적 흐름과 철학을 한데 묶은 서술이다. 보통 철학사라면 개별 학자나 이론을 나열하면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학자나 이론을 설명하되 당대 시대 상황에 얽힌 전체 맥락을 들려주는 데 더 방점을 찍었다.


철학은 우리 인간 보편의 고민을 다룬다


가령 이번에 내놓은 4권에서만 봐도 20세기 현대 서양철학의 흐름을 '생성존재론'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19세기 조선의 실학자 혜강 최한기(1803~1879)의 기(氣)학적 세계관과 비교한다. "지금 시대를 두고 글로벌 시대라고들 하지만 사실 서구 중심의 글로벌이에요. 우리 얘기를 가져다 견줄 수 있어야 서구 중심에서 벗어난 인류 보편의 사유라 할 수 있고, 그래야 진짜 글로벌이 되는 겁니다. 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2011년 1권부터 올해 4권까지 13년에 걸쳐 발간된 세계철학사 1~4권. 도서출판 길 제공

2011년 1권부터 올해 4권까지 13년에 걸쳐 발간된 세계철학사 1~4권. 도서출판 길 제공

20세기 후반 철학계에서 큰 관심을 받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자크 데리다의 '타자의 윤리학' '환대의 윤리학'에 대해서는 그 기원을 독일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에서 찾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이 역시 철학사를 '남의 나라 사람들이 하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 흐름에 따라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보편적 고투'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푸코 공부는 동양철학을 더 잘 이해하려는 것


사실 이는 만용으로도 보일 수 있는 작업이다. 동시에 이 원장이기에 가능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 원장은 서울공대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흔히 말하는 전공으로 따지자면 서양, 그것도 프랑스 현대 철학자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종말 이후 가장 영향력 있었던 것이 프랑스 현대 철학이었기에 그걸 공부하고 논문을 그렇게 썼다뿐, 그게 내 유일한 전공이고 거기에 대해서만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집안 자체가 한학에 깊었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부는 말하자면 동학의 접주 같은 분이셨고, 부친은 한학을 하셨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 입장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다는 건 서양을 아는 것 못지않게 동양 그 자체를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어요." 현실의 벽은 높았다. 푸코를 공부했으나 노자, 장자 이야기까지 꺼내는 그를 학계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공의 벽에 막힌 대학을 박차고 나가 이룬 성과


젊은 철학자로 주목받았음에도 이 원장은 1998년 서강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를, 연구자 공동체인 소운서원을 만들었다. "전공에 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읽고 쓰기 위해서다. 4권으로 된 세계철학사는 그렇게 제도권 밖으로 나선 이후의 시간을 몽땅 갈아 넣은 책이기도 하다.

막상 다 끝낸 뒤 후회나 아쉬움 같은 건 없을까. "대학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물론 좀 더 절박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책이란 게 늘 써놓으면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골격은 어느 정도 갖춘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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